"우리나라가 자랑한다는 누구누구가 그렇게 정말 굉장해?" 필자가 종종 듣곤 하는 질문이다. 물론 해당 연주가에 따라 대답은 달라진다. 그러나 장영주에 대한 필자의 답은 한결같다.
"영주는 굉장해. 그의 세대에서 최고로 기억될거야. 벤게로프나 샤함, 미도리 같은 동년배 연주가들이 있지만, 지금 영주만큼 많은 음반을 내놓고, 여러 명문악단과 연속 협연하고, 높은 평가를 받는 연주가는 없어."
그런데 왜 겁을 줘?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거의 순전히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겠다. 그리고 그 질투는 뿌리가 깊다. 시작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1993년쯤이었던가, 당시 새로 개발한 필자의 취미가 'LD 빌려보기'였다. 퇴근후 용산 전자상가에 들러 콘서트나 여행에 관련된 영상물을 빌리고,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비디오에 녹화했다. 영상물을 틀 때마다 FBI는 계속 경고를 보내왔지만, (허가받지 않은 복제는 연방법에 의해…) 이땅이 '연방'에 속해 있지 않아서인지 기계의 헤드부분을 망치지는 않았다.
복제물 라이브러리가 제법 커졌을 때 쯤 마주친 LD가 '리우 환경음악회'였다. 1991년 세계 정상과 관계장관들이 모인 '리우 환경회담'에 맞춰 열린 기념콘서트 실황이었다. 드라큘라인가 뭐 그런 배역으로 눈에 익은 배우가 사회를 보았고, 플라시도 도밍고가 종횡무진으로 뛰며 또하나의 호스트 역할을 했다. 그때 도밍고가 부르는 '흑인 올페'의 노래는 달콤했지만 '삼손과 델릴라'의 2중창에서 전주를 연주하는 현악부는 잡음에 가까운 합주로 분위기를 깼다. 뭐 그런 음악회였다.
해서 조금 졸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회자의 중간 코멘트가 귀를 솔깃하게 했다. "저도 어릴 때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만, 이 소녀의 연주를 들었다면 더 일찍 포기했을 겁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사라 장입니다."
사라 장? 이제야 연주모습을 보게 되는구나. 여덟살 때 주빈 메타의 눈에 띄어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는 신동. '자랑스런 우리의 핏줄'. 지구 반대편 브라질까지 날아갔구나. 어디 어느정도인지, 한번 지켜볼까? 짤깍, 소리가 나게 눈을 떴다.
파란 옷을 입은 자그마한 소녀가 나타나 또박또박 무대 앞으로 나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나 서둘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항상 해온 일이라는 듯, 표정이 없었다. 박수가 계속되자 비로소 희미하게 미소를 보였다. 전주가 시작됐다.
심벌이 끼어든 요란스런 전주가 끝나자 '어린이'는 활을 치켜들었다. 휙 내리그었다. 음? 시원시원했다. 끝에서 끝까지, 활을 다 썼다. 명쾌하게 짚었고, 활달하게 그어댔다. 거칠 것이 없다는 식이었다. 화면을 외면하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어린이가 사라지고 없었다. 저뜻이었구나. '귀기(鬼氣)'가 느껴지는 아이라는 소리가….
그런데 그 활달함과 명쾌함, 시원시원함보다 더 마음에 짚이는 것이 그의 태연함이었다. 어려운 악구를 덥석 덥석 삼키다 보면 어른이라도 자기도 모르게 성급해질텐데, 실제로 그런 연주도 많이 들어 알고 있는데. 그런데 '아이'는 그렇지 않았다. 발 아래 메트로놈이 있어 그의 연주를 꽉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독주부가 몇 마디씩 쉴 때, 활을 내려들고 있는 그의 표정은 "듣고만 있자니 조금 심심하군"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가 그 일의 시작이었다. 사라를 겁주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필자는 새로 부닥치는 일 하나하나가 다 두려웠던 직장 초년생이었다. 그래서 더 질투가 커져만 갔을까. '꼬마가 겁도 없이….'
그러나 그 뒤로는 훨씬 더 긴요하고 급한 일이 많았다. 여기저기 이름도 내밀어야 했고, 직장도 옮겨야 했으며, 아빠가 되어야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서야 한참동안 잊고 있었던 연구에 다시 도전해보게 되었다. 바로 예술의 전당이 판을 제공했으니까.
자, 장영주를 당황하게 하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요.
정말 어려운 곡을 연주하게 한다!
천하의 사라라고 해서 어려운 레퍼토리가 없을까. 준비할 수 있는 최소의 기간만 주고, 한번 완벽하게 소화해보라고 하면 그렇게 태평하지는 못하겠지. 그런데 어떤 곡이라면 정말 어려운 작품일까….
그런데 이 생각은 일찌감치 난관에 부딪쳤다. 문제는 1999년 작곡가 리햐르트 시트라우스의 서거 50주년이었다. 작곡가 사후 50주년이면 악보 저작권 시효가 소멸한다는 사실, 음반사들도 다 아는 이야기겠지? 그래서, 어려운 기교로 소문났다는 시트라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누가 녹음할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바로 사라였던 것이다.
"시트라우스의 협주곡은 연주가들이 피하는 곡이에요. EMI도 50주년에 맞춰 음반을 내려고 여러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부탁해보았지만 다들 거절했다고 해요. 악보를 보니 왜들 기피했는지 짐작은 됐어요.(!) 하지만 저는 이 음악이 금방 좋아졌거든요."
그런데 이 앨범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어땠던가. "첫악장은 감정이 무쌍하게 변화하는 악장이다. 보리스 벨킨의 음반이 그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했었다. 마지막 악장은 지난한 기교를 필요로 한다. 쑤웨이가 연주한 음반이 그 꼼꼼한 기교를 모두 소화했다. 그런데 사라 장의 음반은 그 모두를 갖추고 있다." (영국 그라머폰지)
그래서 이 계획은 포기하기로 했다. 누구나 기교 때문에 피하는 작품을 그는 즐긴다고 하지 않는가. 최상의 평가까지 받지 않는가.
갑자기 레퍼토리를 바꾸어버린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읽은 얘기다. 바이올리니스트인데 누구인지는 기억이 안나고, 급한 연주일정에 맞춰 허겁지겁 리허설도 없이 협연무대에 올랐단다. 그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연주될 걸로 알고 있었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들고 곧 연주가 시작됐다. 그런데 관현악으로 흘러나오는 선율은 베토벤이 아닌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던 거다. 이 협주곡은, 한 마디가 채 못되는 관현악의 전주에 이어 곧바로 바이올린 솔로가 등장한다. 바이올리니스트는 머리끝이 주뼛 서는 쇼크를 느꼈지만 2초 내에 정신을 수습하고 간신히 연주를 시작했다. 매니저가 곡목 변경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 그렇게 음모를 꾸미면 되겠다. 멘델스존보다 좀더 어려운 기교가 필요하면서 전주는 그만큼 짧은 곡이면 더욱 좋겠다. 쇼크를 먹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상당히 당황하겠지….
그런데 이 계획도 포기해야만 했다. 다름아닌, 미국 공영방송 PBS가 사라와 가진 인터뷰를 접하고 필자가 먼저 충격을 받은 탓이다.
질문 자체는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사회자는, "책을 보거나 TV를 보면서 협주곡을 연습할 수도 있나요?"라고 물어보았던 것이다. 필자가 느끼기로는, 한마디로 같쟎은 질문이었다. "예술가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뭐 TV를 보면서 연습을 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틀렸다. 사라는, 장영주는 "할 수 있어요."라고 대답한 것이다.
"악기 연습이란 게, 일종의 '근육 기억시키기' 거든요. 스케일을 연습할 때는 보통 TV를 켜고서도 해요. 어떨 때는 곡을 연습하면서도 해요. 좋은 일은 아니죠. 그런데 어떨 때는 그게 도움이 돼요.
왜냐하면, 콘서트 중에는 별별 일이 다 일어나거든요. 모든 일이 완벽하게 진행되는 일이란 드물어요. 어떤 사람이 심장이 멎었다고 실려나가는 것도 봤고, 화재경보가 울리기도 했고, 지진이 나기도 했죠. 그래도 연주를 계속해야 해요. 그런데 TV를 보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연주가 가능할 정도가 되면, 웬만큼 특이한 일이 아니면 동요하지 않고 연주를 계속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 이 계획도 실패다. 머리가 아니라 근육이 기억할 정도로 연습을 한다는데, 관현악이 시작되면 0.1초 내에 자동적으로 그의 솔로가 튀어나오지 않겠는가. 이런!
게다가 나머지 작업도 더 어려워지게 됐다. 연주회장에 지진이 나도, 사람이 실려나가도 당황하지 않고 연주를 계속하는 경지가 됐다는데 무슨 수로 그를 겁먹게 하겠는가. 그래서 머리를 짜낸 마지막 아이디어,
소화가 불가능 할 정도로 타이트하게 일정을 짠다!
피로 앞에서는 장사 없다. 연주, 이동, 연주, 이동, 레코딩. 지쳐 쓰러지도록 고집스럽게 일정을 강행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겁은 먹을 것 아닌가.
필자의 경우 25매짜리 외부원고의 마감일만 다가와도 겁을 덜컥 먹게 된다. 담당자의 화난 얼굴이 (한 번도 못 봤지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다. 분명 너무 바빠진다는 것은 사람이 더럭 겁을 먹을 만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 이것마저 사실은 통하지 않을 일이 됐다. 그것은 바로 그의 부모들이 필자의 위협으로부터 딸을 방어하기 위해(?) 어릴적부터 실시한 '마인드 콘트롤' 탓이다.
"어떤 연주회를 준비하는데 이틀 밖에 시간이 없던 일이 있었어요. (혹시, 장기적 플랜이 부족한 고국의 매니지먼트사가 강요한 건 아니었을까? -필자) 그런데 부모님이 그러시는 거에요. '괜찮아. 여섯 살 때부터 그 곡은 알쟎니. 걱정하지 마.' 그래서 괜찮았어요. 마음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연습도 하고 공연도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래서일 것이다. 12일동안 열 번이나 공연이 잡혀 있는 투어 와중에도 그의 인터뷰는 곧잘 유쾌함과 환한 빛으로 넘친다. '정말 재미있네요.' 레코딩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레코딩을 며칠 앞두고 신경과민에 빠져 식사도 못하는 연주가를 여럿 보았다. 그런데 그는 "레코딩이야 말로 가장 재미있는 일"이란다. 지휘자들과 친구가 되는 시간도 레코딩 기간중이라나.
결과적으로, 이젠 고백할 수 밖에 없게 됐다. 필자는, 우리는 장영주를 당황하게 할 수 없다. 사실은 이것이 그가 가진 가장 큰 '괴력'이다.
연주가를 평하는 다른 통속의 언어들로는 그를 설명할 말이 자주 막힌다. '기능적으로 완벽하다'라면 '예술적으로 불안하다'라는 뉘앙스가 깃들이게 되며, '스케일이 크다'라면 '섬세함이 떨어진다'라고 들리기 쉽기 때문이다. 당연히 장영주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겁없다'라는 말로는 그를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여덟 살 때 뉴욕 필과 협연하고, 열한 살에 세계 최대 클래식레이블에서 데뷔음반을 발매하고, 열네 살 전에 세계 3대 교향악단과 협연을 마친 주인공. 음반이 발매될 때 마다 그라머폰 등 유수 음악지로부터 "프레이징(분절) 완벽, 보윙(활긋기)완벽, 음색 완벽, 해석과 개성 완벽"의 찬사를 듣는 사라 장. 그는 10월 24, 25일 다시 고국 팬들 앞에 선다. 쿠르트 마주어가 지휘하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의 협연자로서다.
TV를 보면서도 연습한다는, 그의 근육이 그 흐름을 외우고 있다는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그는 이번에 연주한다. 어떻게 하지. 태연해야 할 필자의 가슴이 오히려 벌써 뛰기 시작하네….
유윤종(예술의 전당 소식지 '아름다운 친구' 9월호)
"영주는 굉장해. 그의 세대에서 최고로 기억될거야. 벤게로프나 샤함, 미도리 같은 동년배 연주가들이 있지만, 지금 영주만큼 많은 음반을 내놓고, 여러 명문악단과 연속 협연하고, 높은 평가를 받는 연주가는 없어."
그런데 왜 겁을 줘?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거의 순전히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겠다. 그리고 그 질투는 뿌리가 깊다. 시작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1993년쯤이었던가, 당시 새로 개발한 필자의 취미가 'LD 빌려보기'였다. 퇴근후 용산 전자상가에 들러 콘서트나 여행에 관련된 영상물을 빌리고,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비디오에 녹화했다. 영상물을 틀 때마다 FBI는 계속 경고를 보내왔지만, (허가받지 않은 복제는 연방법에 의해…) 이땅이 '연방'에 속해 있지 않아서인지 기계의 헤드부분을 망치지는 않았다.
복제물 라이브러리가 제법 커졌을 때 쯤 마주친 LD가 '리우 환경음악회'였다. 1991년 세계 정상과 관계장관들이 모인 '리우 환경회담'에 맞춰 열린 기념콘서트 실황이었다. 드라큘라인가 뭐 그런 배역으로 눈에 익은 배우가 사회를 보았고, 플라시도 도밍고가 종횡무진으로 뛰며 또하나의 호스트 역할을 했다. 그때 도밍고가 부르는 '흑인 올페'의 노래는 달콤했지만 '삼손과 델릴라'의 2중창에서 전주를 연주하는 현악부는 잡음에 가까운 합주로 분위기를 깼다. 뭐 그런 음악회였다.
해서 조금 졸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회자의 중간 코멘트가 귀를 솔깃하게 했다. "저도 어릴 때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만, 이 소녀의 연주를 들었다면 더 일찍 포기했을 겁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사라 장입니다."
사라 장? 이제야 연주모습을 보게 되는구나. 여덟살 때 주빈 메타의 눈에 띄어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는 신동. '자랑스런 우리의 핏줄'. 지구 반대편 브라질까지 날아갔구나. 어디 어느정도인지, 한번 지켜볼까? 짤깍, 소리가 나게 눈을 떴다.
파란 옷을 입은 자그마한 소녀가 나타나 또박또박 무대 앞으로 나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나 서둘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항상 해온 일이라는 듯, 표정이 없었다. 박수가 계속되자 비로소 희미하게 미소를 보였다. 전주가 시작됐다.
심벌이 끼어든 요란스런 전주가 끝나자 '어린이'는 활을 치켜들었다. 휙 내리그었다. 음? 시원시원했다. 끝에서 끝까지, 활을 다 썼다. 명쾌하게 짚었고, 활달하게 그어댔다. 거칠 것이 없다는 식이었다. 화면을 외면하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어린이가 사라지고 없었다. 저뜻이었구나. '귀기(鬼氣)'가 느껴지는 아이라는 소리가….
그런데 그 활달함과 명쾌함, 시원시원함보다 더 마음에 짚이는 것이 그의 태연함이었다. 어려운 악구를 덥석 덥석 삼키다 보면 어른이라도 자기도 모르게 성급해질텐데, 실제로 그런 연주도 많이 들어 알고 있는데. 그런데 '아이'는 그렇지 않았다. 발 아래 메트로놈이 있어 그의 연주를 꽉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독주부가 몇 마디씩 쉴 때, 활을 내려들고 있는 그의 표정은 "듣고만 있자니 조금 심심하군"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가 그 일의 시작이었다. 사라를 겁주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필자는 새로 부닥치는 일 하나하나가 다 두려웠던 직장 초년생이었다. 그래서 더 질투가 커져만 갔을까. '꼬마가 겁도 없이….'
그러나 그 뒤로는 훨씬 더 긴요하고 급한 일이 많았다. 여기저기 이름도 내밀어야 했고, 직장도 옮겨야 했으며, 아빠가 되어야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서야 한참동안 잊고 있었던 연구에 다시 도전해보게 되었다. 바로 예술의 전당이 판을 제공했으니까.
자, 장영주를 당황하게 하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요.
정말 어려운 곡을 연주하게 한다!
천하의 사라라고 해서 어려운 레퍼토리가 없을까. 준비할 수 있는 최소의 기간만 주고, 한번 완벽하게 소화해보라고 하면 그렇게 태평하지는 못하겠지. 그런데 어떤 곡이라면 정말 어려운 작품일까….
그런데 이 생각은 일찌감치 난관에 부딪쳤다. 문제는 1999년 작곡가 리햐르트 시트라우스의 서거 50주년이었다. 작곡가 사후 50주년이면 악보 저작권 시효가 소멸한다는 사실, 음반사들도 다 아는 이야기겠지? 그래서, 어려운 기교로 소문났다는 시트라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누가 녹음할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바로 사라였던 것이다.
"시트라우스의 협주곡은 연주가들이 피하는 곡이에요. EMI도 50주년에 맞춰 음반을 내려고 여러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부탁해보았지만 다들 거절했다고 해요. 악보를 보니 왜들 기피했는지 짐작은 됐어요.(!) 하지만 저는 이 음악이 금방 좋아졌거든요."
그런데 이 앨범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어땠던가. "첫악장은 감정이 무쌍하게 변화하는 악장이다. 보리스 벨킨의 음반이 그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했었다. 마지막 악장은 지난한 기교를 필요로 한다. 쑤웨이가 연주한 음반이 그 꼼꼼한 기교를 모두 소화했다. 그런데 사라 장의 음반은 그 모두를 갖추고 있다." (영국 그라머폰지)
그래서 이 계획은 포기하기로 했다. 누구나 기교 때문에 피하는 작품을 그는 즐긴다고 하지 않는가. 최상의 평가까지 받지 않는가.
갑자기 레퍼토리를 바꾸어버린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읽은 얘기다. 바이올리니스트인데 누구인지는 기억이 안나고, 급한 연주일정에 맞춰 허겁지겁 리허설도 없이 협연무대에 올랐단다. 그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연주될 걸로 알고 있었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들고 곧 연주가 시작됐다. 그런데 관현악으로 흘러나오는 선율은 베토벤이 아닌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던 거다. 이 협주곡은, 한 마디가 채 못되는 관현악의 전주에 이어 곧바로 바이올린 솔로가 등장한다. 바이올리니스트는 머리끝이 주뼛 서는 쇼크를 느꼈지만 2초 내에 정신을 수습하고 간신히 연주를 시작했다. 매니저가 곡목 변경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 그렇게 음모를 꾸미면 되겠다. 멘델스존보다 좀더 어려운 기교가 필요하면서 전주는 그만큼 짧은 곡이면 더욱 좋겠다. 쇼크를 먹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상당히 당황하겠지….
그런데 이 계획도 포기해야만 했다. 다름아닌, 미국 공영방송 PBS가 사라와 가진 인터뷰를 접하고 필자가 먼저 충격을 받은 탓이다.
질문 자체는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사회자는, "책을 보거나 TV를 보면서 협주곡을 연습할 수도 있나요?"라고 물어보았던 것이다. 필자가 느끼기로는, 한마디로 같쟎은 질문이었다. "예술가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뭐 TV를 보면서 연습을 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틀렸다. 사라는, 장영주는 "할 수 있어요."라고 대답한 것이다.
"악기 연습이란 게, 일종의 '근육 기억시키기' 거든요. 스케일을 연습할 때는 보통 TV를 켜고서도 해요. 어떨 때는 곡을 연습하면서도 해요. 좋은 일은 아니죠. 그런데 어떨 때는 그게 도움이 돼요.
왜냐하면, 콘서트 중에는 별별 일이 다 일어나거든요. 모든 일이 완벽하게 진행되는 일이란 드물어요. 어떤 사람이 심장이 멎었다고 실려나가는 것도 봤고, 화재경보가 울리기도 했고, 지진이 나기도 했죠. 그래도 연주를 계속해야 해요. 그런데 TV를 보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연주가 가능할 정도가 되면, 웬만큼 특이한 일이 아니면 동요하지 않고 연주를 계속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 이 계획도 실패다. 머리가 아니라 근육이 기억할 정도로 연습을 한다는데, 관현악이 시작되면 0.1초 내에 자동적으로 그의 솔로가 튀어나오지 않겠는가. 이런!
게다가 나머지 작업도 더 어려워지게 됐다. 연주회장에 지진이 나도, 사람이 실려나가도 당황하지 않고 연주를 계속하는 경지가 됐다는데 무슨 수로 그를 겁먹게 하겠는가. 그래서 머리를 짜낸 마지막 아이디어,
소화가 불가능 할 정도로 타이트하게 일정을 짠다!
피로 앞에서는 장사 없다. 연주, 이동, 연주, 이동, 레코딩. 지쳐 쓰러지도록 고집스럽게 일정을 강행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겁은 먹을 것 아닌가.
필자의 경우 25매짜리 외부원고의 마감일만 다가와도 겁을 덜컥 먹게 된다. 담당자의 화난 얼굴이 (한 번도 못 봤지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다. 분명 너무 바빠진다는 것은 사람이 더럭 겁을 먹을 만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 이것마저 사실은 통하지 않을 일이 됐다. 그것은 바로 그의 부모들이 필자의 위협으로부터 딸을 방어하기 위해(?) 어릴적부터 실시한 '마인드 콘트롤' 탓이다.
"어떤 연주회를 준비하는데 이틀 밖에 시간이 없던 일이 있었어요. (혹시, 장기적 플랜이 부족한 고국의 매니지먼트사가 강요한 건 아니었을까? -필자) 그런데 부모님이 그러시는 거에요. '괜찮아. 여섯 살 때부터 그 곡은 알쟎니. 걱정하지 마.' 그래서 괜찮았어요. 마음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연습도 하고 공연도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래서일 것이다. 12일동안 열 번이나 공연이 잡혀 있는 투어 와중에도 그의 인터뷰는 곧잘 유쾌함과 환한 빛으로 넘친다. '정말 재미있네요.' 레코딩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레코딩을 며칠 앞두고 신경과민에 빠져 식사도 못하는 연주가를 여럿 보았다. 그런데 그는 "레코딩이야 말로 가장 재미있는 일"이란다. 지휘자들과 친구가 되는 시간도 레코딩 기간중이라나.
결과적으로, 이젠 고백할 수 밖에 없게 됐다. 필자는, 우리는 장영주를 당황하게 할 수 없다. 사실은 이것이 그가 가진 가장 큰 '괴력'이다.
연주가를 평하는 다른 통속의 언어들로는 그를 설명할 말이 자주 막힌다. '기능적으로 완벽하다'라면 '예술적으로 불안하다'라는 뉘앙스가 깃들이게 되며, '스케일이 크다'라면 '섬세함이 떨어진다'라고 들리기 쉽기 때문이다. 당연히 장영주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겁없다'라는 말로는 그를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여덟 살 때 뉴욕 필과 협연하고, 열한 살에 세계 최대 클래식레이블에서 데뷔음반을 발매하고, 열네 살 전에 세계 3대 교향악단과 협연을 마친 주인공. 음반이 발매될 때 마다 그라머폰 등 유수 음악지로부터 "프레이징(분절) 완벽, 보윙(활긋기)완벽, 음색 완벽, 해석과 개성 완벽"의 찬사를 듣는 사라 장. 그는 10월 24, 25일 다시 고국 팬들 앞에 선다. 쿠르트 마주어가 지휘하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의 협연자로서다.
TV를 보면서도 연습한다는, 그의 근육이 그 흐름을 외우고 있다는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그는 이번에 연주한다. 어떻게 하지. 태연해야 할 필자의 가슴이 오히려 벌써 뛰기 시작하네….
유윤종(예술의 전당 소식지 '아름다운 친구' 9월호)
<장영주 팬클럽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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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종종 TV보면서 연습하고 있어서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는 죄책감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이 글을 보니 위안이 되는군...ㅎㅎㅎ 뭐 나도 원래 장영주와 같은 생각(근육이 기억하도록 연습해야 한다)에서 TV보며 연습한거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