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암 수술의 권위자 김진복 서울대 명예교수 별세
[중앙일보 2005-08-18 10:50]
[중앙일보 박태균] 위암 수술의 세계적 권위자인 인봉(仁峰) 김진복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인제대 백병원 위암센터 원장 겸 명예의료원장)가 16일 오후 6시30분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72세.
1933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58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66년 서울대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그 해부터 서울대병원 외과 교수로 일했다. 지난 40년간 고인은 위암 환자 등 무려 7만여 명을 수술하는 전례없는 기록을 세웠다. 또 6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위암 수술 분야에서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학계에 명성이 높았다.
2002년 고인이 심장병으로 쓰러지자 많은 의사들이 '천하의 김진복 시대도 이제 가는구나'하며 안타까워했으나 곧 이를 딛고 일어난 뒤 다시 수술실로 돌아와 '역시 김진복'이란 말을 듣기도 했다.
고인은 98년 서울대 의대를 정년 퇴임한 뒤에도 인제대 서울백병원 위암센터 원장으로 재직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또 국제위암학회 명예회장, 아태암학회 명예회장, 대한암협회 회장을 지냈다. 미국외과학회지 및 미국암학회지 등 15개 국제학술지의 편집위원과 미국외과학회, 미국외과학술원, 일본외과학회의 명예회원이기도 했다. 네덜란드 라이든의대와 중국 북경의대의 명예교수로도 활동했다.
고인은 5.16민족상, 콜롬비아대십자훈장, 국민훈장 모란장, 대한민국학술원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은 바 있다.
유족으론 부인 이덕미씨와 김대용 서울대 수의대 교수 등 2남1녀가 있다. 양한광 서울대 의대 외과 교수가 사위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이며 발인은 20일 오전 8시다.
[중앙일보 2005-08-18 10:50]
[중앙일보 박태균] 위암 수술의 세계적 권위자인 인봉(仁峰) 김진복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인제대 백병원 위암센터 원장 겸 명예의료원장)가 16일 오후 6시30분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72세.
1933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58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66년 서울대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그 해부터 서울대병원 외과 교수로 일했다. 지난 40년간 고인은 위암 환자 등 무려 7만여 명을 수술하는 전례없는 기록을 세웠다. 또 6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위암 수술 분야에서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학계에 명성이 높았다.
2002년 고인이 심장병으로 쓰러지자 많은 의사들이 '천하의 김진복 시대도 이제 가는구나'하며 안타까워했으나 곧 이를 딛고 일어난 뒤 다시 수술실로 돌아와 '역시 김진복'이란 말을 듣기도 했다.
고인은 98년 서울대 의대를 정년 퇴임한 뒤에도 인제대 서울백병원 위암센터 원장으로 재직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또 국제위암학회 명예회장, 아태암학회 명예회장, 대한암협회 회장을 지냈다. 미국외과학회지 및 미국암학회지 등 15개 국제학술지의 편집위원과 미국외과학회, 미국외과학술원, 일본외과학회의 명예회원이기도 했다. 네덜란드 라이든의대와 중국 북경의대의 명예교수로도 활동했다.
고인은 5.16민족상, 콜롬비아대십자훈장, 국민훈장 모란장, 대한민국학술원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은 바 있다.
유족으론 부인 이덕미씨와 김대용 서울대 수의대 교수 등 2남1녀가 있다. 양한광 서울대 의대 외과 교수가 사위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이며 발인은 20일 오전 8시다.
이 기사를 보니 1997년 7월 1일의 장면들이 하나 하나 머리속에 떠올랐다.
우리 엄마가 처음으로 위암수술을 받은 날이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장맛비가 새벽부터 무섭게 쏟아지던 날이었다.
이날 아침 7시에 수술을 시작한다고 하여 안산 집에서 5시쯤 나와 전철을 타고 부랴부랴 병실에 도착했지만 엄마는 이미 수술실에 실려간 후였다.
전날 밤 병실을 지켰던 아버지와 함께 수술실 옆 대기실에서 1분이 한시간인것 처럼 느끼면서 두 시간 여를 기다렸다.
수술을 집도한 김진복 교수님은 수술 중간에 가족을 한 번 부를테니 반드시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명령"을 하고 들어가셨다 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꽤 오래 기다렸을 때 초조하게 기다리던 아버지가 갑자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나가셨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안계신 그시간에 수술실에서 환자보호자를 찾는 호출이 있었다.
나는 어쩔줄을 몰라 남자 화장실 앞까지 달려가서 아버지를 부르려고 하다가 포기하고 다시 돌아와서 할 수 없이 내가 들어갔다.
수술장 안이 아니라 수술 준비실이었기때문에 엄마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김진복 교수님과 간호사 한 명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가자 마자 "대기하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늦게 오느냐"며 불호령이 떨어졌다.
죄송하다며 진뜩 긴장해 있는 나에게 손에 들고 있던 뭔가를 보여줬다.
그것은 절제해 낸 엄마의 위(胃)였다.
이만큼 잘라냈고 이것이 암조직이라고 보여주면서 수술 경과에 대해 설명을 했던 것 같긴 한데, 그 당시에는 하도 당황하고 긴장하고 정신이 없어서 뭘 보았고 무슨 말을 들었는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잘라낸 위의 크기가 손바닥 만 했다는 정도이다.
지금 같았으면 디카라도 들고 가서 사진이라도 찍어오겠다고 하고 싶지만...
수술 후 회진시간이나 퇴원 후 외래진료때 엄마를 따라 가서 몇 번 더 그 분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나에게는 항상 엄하고 무서운 이미지로 남아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에게서 수술받은 환자와 가족들에게 그는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특별하다면 특별한 인연이 있는 김진복 교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분이 착찹하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사람은 늙고 죽게 되는구나 하는 것이 절실히 느껴지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셨으니 좋은 곳에 가셨겠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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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셨군요.. 어머니가..지금은 건강하신거죠?
저도 뉴스에서 며칠전 보면서 맘속에 뭔가가 움직이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답니다.. 사람이 나서, 이렇게 살다가야 하는데.. 그런 생각도요..
그 후 두 번의 수술을 더 받고나서 2001년 5월에 돌아가셨답니다.
하늘나라에서 김진복 교수님 만나서 반가워하실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