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서 생긴 일

일기 2006/02/08 23:51 PlusAlpha
남들 다 봤다는 "왕의 남자"를 뒤늦게 보기 위해 오늘 저녁 퇴근후 영화관에 갔다.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라던데 뒷줄에서 예닐곱살 된 아이의 목소리가 자꾸 들린다.
영화에 등장하는 음담패설이나 각종 장면들을 이해하지 못하니 엄마에게 자꾸 물어본다.

"저거 뭐야?"
"뭐라고 한거야?"
"왜 그런거야?"
"저 사람 왜 죽었어?"

엄마는 일일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준다.

영화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났을 때 인내심의 한계를 느껴, 뒤에다 대고 "조용히 좀 하세요"라고 말하고 말았고, 그 말은 효과가 있어서 금방 조용해졌다.
이 말을 하고 나서 한 10분쯤 뒤에 영화는 끝났다.
그렇게 얘기한 것을 즉시 후회했다. 조금만 더 참았으면 끝날 것을...

그런데...영화가 끝나고 일어서니 뒷줄의 여자가 날 쳐다보며 할 말이 있다는 듯 기다리고 있다.
그 젊은 엄마와 눈이 마주치기까지의 짧은 시간동안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하며 상상한 대화의 대사는 이러했다.

"저희때문에 시끄러우셨어요? 죄송했습니다. 우리 애가 워낙 호기심이 많아서 자꾸 질문을 하는 바람에...^^"
"아 예, 저도 아까 제가 한 말때문에 기분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뭐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지나친 기대였나...?-_-)

그런데 그 사람이 한 말은 이랬다.

"아이한테 설명해주느라 얘기 좀 한건데, 그게 그렇게 크게 들렸어요???"
(어... 방향이 빗나가고 있다...)
미안한 생각이 없고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대본에 없던 대사가 나오자 나는 당황했고 흥분되었다.
(원래 뻔뻔한 사람을 보면 좀 흥분한다-_-)

"네, 크게 들렸구요. 계속 방해됐습니다. 그렇게 일일이 설명해가면서 영화보시려면 집에서 비디오로 보셔야죠."
(이런이런, 이건 아닌데...)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출입문을 향해 내려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그 여자는 계속 말을 한다.

"이봐요 아가씨, 사람이 더불어 살 줄을 알아야지... 그렇게 혼자만 잘나서 남 생각은 하나도 안하나?"
(나보다도 어려 보이는데 훈계조에 반말까지... 극장이 어두워서 날 젊게 본 모양이니 이건 용서해 주도록 하자.)

그나저나 "더불어 살 줄 알아야 한다"라...
과연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건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사람 많은 극장에서 영화를 조용히 봐야 한다는 기본 예절을 가르치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지...

아무튼,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 살기로 했던 연초의 목표를 벌써 어기고 뾰족뾰족한 언행을 한 것을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첫째, 웬만한 거슬리는 상황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감각을 둔하게 하거나 인내심을 길러야 하며,
둘째, 부득이하게 그러한 거슬리는 상황을 지적하게 되었을 경우, 예상 대본을 다양하게 준비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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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8 23:51 2006/02/08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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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루 2006/02/09 14: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열받으셨겠는데요 ㅡ.,ㅡ;; 요즘은 애나 어른이나 예절이 없죠 ㅋ 근데 그 아줌마는 개념이 없으신듯 한데요.. (억..내가 이런말 할 때가;;;)

  2. 개구리 2006/02/10 2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관, 애엄마 두곳 다 화가 좀 나네요..--+
    가장 두려워지는건 손을 잡고 온 어린 아들이에요.. 부모욕심에 영화보여주고파 데리고 왔지만 영화내용보다 엄마의 잘못된 모습을 아이에게 심어준건 아닌지요.. 애가 커서.. ^^;;;
    에효..~ PlusAlpha님 잘하신 겁니다! 저도 그런상황에선 꼭 말을 하고 넘어갑니다. 말을 듣고도 계속 말하는 사람도 있는걸요.. ㅠㅠ; 잊어버리세요!!

    • PlusAlpha 2006/02/10 21:5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평소엔 정말 소심한데, 남에게 폐를 끼치는 철면피를 만나면 저 자신도 놀랄 정도로 이상하게 용기가 불끈 솟아오르고 매우 대범해지거든요. 이런 때 말고 다른 때 대범해졌으면 더 좋았을텐데...-_-
      아무튼 저도 그 아이에게 엄마의 뻔뻔함이 대물림될 것을 생각하면 좀 착잡합니다.

  3. sarapak 2006/02/10 23: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은 누구나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기 마련인가봐요. 그냥 좀더 참으실걸 그랬어요. 피해보고.. 안좋은소리까지 듣고.. 참.. 말해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거 같아요. 아이가 있어서 더 화를 냈을까.. 자기 아이밖에 안보였을거 같아요. 정말 매너없는 사람들 싫어요. ^^

  4. 단테.. 2006/02/10 23: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더불어 살려면 영화보는 주위의 여러 사람들을 좀 생각하시지..
    요즘 개념없는 엄마들 많은 것 같아요..지하철 좌석에도 신발신고 올라가서 막 뛰어도 그냥 두고.. 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