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독립한지 꼭 50일이 되는데 결국 오늘 아침에 전부터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침에 평소보다 조금 늦게 나오면서 허둥댔고, 마침 옆집에서 못 듣던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나는 바람에 딴 생각을 한 게 화근이었다. 집을 나서서 열심히 가다가 생각해보니 문을 제대로 잠그고 나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시끄러운 것에 매우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인간인지라 계약할 때 옆집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혹시 시끄러운 사람이 살면 곤란하니까... 주인아주머니는 임신한 신혼부부가 살고 있는데 이번달에 계약기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곧 나갈 것이라고 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웃집을 간섭하지 않는다. 물론 인사도 나눈 적 없고 마주친 적도 없어서 누가 사는지 얼굴도 모른다. 나로서는 그게 더 속 편한 일이지만...^^

그런데 오늘 아주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좀 궁금해졌다. 벌써 아기를 낳은 건가... ? 그러면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나는 매일 아기 울음소리에 시달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번달에 나간다더니 월말이 다 되었는데 왜 아직도 있지....? 계약을 연장한건가...? 아기낳자마자 이사하기도 쉽지는 않겠지... 그럼 난 어쩌지...? 이 집에 사는동안 계속 아기 소음(?)을 들으며 살아야 하는건가...? 그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소리이긴 하지만 난 정말 싫다... 난 조용히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문을 닫은 것까지는 생각나는데 열쇠를 꽂아 돌리는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미 습관화되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억나지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내가 딴 생각하다가 문 잠그는 것을 잊고 나온 것은 아닌지...?

마음 한구석에서 걱정이 시작되었지만 되돌아가서 확인을 하기에는 너무 많은 거리를 와버렸고 시간도 빠듯하게 남아있어서 그냥 출근을 했다. 하지만 역시 아무래도 그게 마음에 걸려서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몇년전 집에 도둑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온 서랍과 장롱을 다 열어젖히고 헤집어 꺼내놓은 그 장면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충격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그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하긴... 손바닥만한 원룸에 숨겨둔 귀금속이나 현금도 없고 컴퓨터 빼고는 값비싼 가전제품도 없고 이렇다하게 가져갈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나만의 공간을 누군가가 무단침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를 불안하고 두렵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국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집에 가보기로 했다. 전에 살던 집이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지금 내가 사는 곳은 길이 막히지 않는 점심시간이라면 2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다.

문 앞에 도착해서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손잡이를 돌려보니... 문은 제대로 잘 잠겨있었다...-,.-;

한편으로는 안도감에, 다른 한편으로는 허탈감에 힘이 빠졌다. 이런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이 사건의 발단은 건망증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강박증이라 해야 하나... 둘 다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면서 지난 주말 TV에서 본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가 생각났다. 강박증 환자 유달 아저씨(잭 니콜슨)의 이야기가 남의 일같이 느껴지지 않아 가슴이 뜨끔했던 터였다.

물론 저 정도로 심하지는 않지만... 식당의 위생상태를 의심하면서 나도 차라리 개인 수저를 갖고다녀볼까 생각한 적도 있고 어릴 때는 보도블럭의 금을 밟지 않고 다니려고 노력해본 적도 있기 때문에 그의 심정에 공감이 갔다.

점심시간에 집에 와보니 색다른 기분이었다. 마침 집앞에 빵집이 새로 개업했다기에 점심도 때우고 맛을 평가(!)해보기 위해 샌드위치를 사다가 집에서 먹고 커피까지 만들어 마신 뒤 아주 가볍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물론 문 잠그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한 뒤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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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30 21:12 2001/10/30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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