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보내고

글모음/생각 2001/05/24 17:54 PlusAlpha
벌써 열흘이 지났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엄마를 땅에 묻고 옷과 유품을 다 정리하고 났는데도
지금도 병실에 찾아가면 엄마가 나를 기다리며 누워계실 것만 같다.
그나마 임종을 볼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엄마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에는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방송대 중간고사 공부를 하나도 해놓지 못해서
공부한다는 핑계로 병원에 가보지 못했다.
엄마는 은근히 나를 기다리시는 눈치였으나
공부해야 한다니 마지못해 그러라고 하셨고
나도 서운해 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모른체 하고 가지 않았다.
차라리, 안된다고 그까짓 시험이 뭐가 중요하냐고
엄마 보러 오늘 꼭 좀 오라고 하셨더라면 좋았을텐데...

결국은 "오늘 하루만 병원 안가고 집에서 공부좀 하고 내일 갈게요"라고
전화한 것이 마지막 대화가 되고 말았다.
장례를 치르느라 시험도 보지 못했는데...
이럴줄 알았으면...
두고두고 평생의 한으로 남을만한 일이다...

그 전날만 해도 컨디션이 나쁘지 않고
찾아온 손님들과 이야기도 많이 하셨다고 하기에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장례절차는 정신없어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척척 잘도 진행되었다.
늦게 밤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시간이 빠듯했다.
우리나라의 장례의식은
상제에게 며칠동안 잠을 안재우고
문상객에게 수백 번 절을 시킴으로써
극도의 피곤 상태로 몰아넣어
슬픔을 잊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모양이었다.

동생 혼자만 세워놓으면 엄마가 쓸쓸해 하실 것 같아서
나도 함께 문상객을 맞았다.
결국 장례 마치고 호된 몸살을 앓았다.

이번에 문상객을 맞으면서
새삼스럽게 느낀 것이 세 가지 있다.

첫째, 한국의 장례의식은 매우 철저히 가부장적이라는 것.
나란히 서서 똑같이 인사하고 절하는데도 마치 내가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모든 절차는 '상주'인 아들 중심이었다.
아들이 없었으면 꽤나 쓸쓸하고 비참한 빈소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긴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사람들이 왜 그렇게 아들을 낳으려고 애를 쓰는지를 알 것 같다.

둘째, 발가락 양말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
스타킹처럼 발등이 훤히 비치는 양말을 신은 아저씨들도 있었다.

셋째, 사람에 따라 문상하는 절차도 십인십색이라는 것.
어떤 스타일이 정식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특히 엄마와 가까웠던 사람들마다
나에게 똑같은 말을 한마디씩은 했다.
엄마가 마지막 떠나실 때까지 마음을 편히 놓지 못하고
걱정거리를 가져가시도록 했으니
나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내 앞에서는 눈물 한 번 보이지 않고
나를 걱정하는 말씀은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내 걱정을 많이 하고
많이 우셨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으니 속상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가 곁을 지키지 못하고
간병인과 호스피스 자원봉사자에게만 맡겨놓은 낮시간에는
많이 쓸쓸해하고 외로워하셨다고 한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이제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만나는 것을 미루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하는 것을 미루지 않으며 살려고 한다.
가능한 한 아쉬움이 남을만한 상황은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이번에 엄마를 멀리 보내면서
가장 절실히 느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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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24 17:54 2001/05/24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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