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곡에서의 추억 1

글모음/생각 2001/03/09 17:40 PlusAlpha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시골집을 떠나 처음으로 이사라는 것을 하고 "역곡"에서 살았던 것이 1975년 여름부터 1977년 3월초까지 1년 반 정도이다.

"역곡"이란, 당시 행정구역상 주소는 부천시 역곡동 250번지였는데 우리 가족들은 모두 그곳을 역곡이라 불렀다.
우리가 살던 곳은 경기도 잠종장 사택이었다.
그당시 농촌에서는 누에를 길러 누에고치를 생산하는 일을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한창 보급했던 모양이다.
잠종장은 그런 일을 담당하던 기관이었다.

지금은 부천시가 빽빽한 아파트와 빌딩숲으로 변해 있지만 그때는 역곡역에서부터 우리가 살던 잠종장까지는 넓은 밭과 공터만 펼쳐져 있었고 우리 뒤쪽에는 조그맣고 낡은 일본식 주택들이 한산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동네는 집집마다 마당에 우물이 있었는데 한집도 빼놓지 않고 모든 우물마다 꼭대기에 두레박을 양쪽으로 매달아놓은 도르래가 달려있었다. 한쪽 줄을 잡고 아래로 열심히 끌어내리면 반대쪽에서 물이 담긴 두레박이 올라오는데, 어린이들도 쉽게 물을 길어올릴 수 있었다. 정말 신기했고 어린 내가 봐도 무릎을 칠만큼 감탄스러웠다. 그것은 오래전 일제시대부터 일본사람들이 쓰던 것 같았다.

우리가 살던 집도 일본식이었다.
대문이 없고 바로 현관문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집 가운데 있는 현관문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부엌 쪽으로 나있는 문을 현관문처럼 사용했다.
현관문을 들어가면 한구석에 욕조가 있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옆으로 길고 넓은 욕조가 아니라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가서 앉아있으면 꽉 찰 만큼 좁고 세로로 긴 욕조였다.
욕조 밑에는 아궁이가 있어서 불을 때서 물을 데우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욕조는 우리가 그 집에 사는 동안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화장실이, 그것도 수세식 아닌 재래식 화장실이 실내에 있었다는 점이다.
보통 시골에서 보던 화장실보다 몇 배나 깊어서 들여다보면 무시무시했다.
깊어서 그런지, 변기 구멍을 덮개로 덮어놓아서 그런지, 냄새가 난다거나 하는 비위생적인 불편은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또 일본집답게 방마다 붙박이 벽장이 많이 있었다. 그것을 오시이레(押し入れ)라고 한다는 것은 나중에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 집의 마룻바닥이나 나무기둥에는 비스듬히 관통된 구멍 같은 것이 군데군데 있었는데 그것은 6.25때 총알을 맞은 자국이라고 했다.

처음 이사간 것은 아주 더운 한여름으로 학생들의 여름방학 기간이었는데, 방학이 끝나고 가을 새학기가 되면서 '샛별유치원'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사가기 전에도 교회에서 운영하는 송산유치원에 다녔었는데 이번에도 교회 부속 유치원이었다. 교회는 아주 작았는데 교회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샛별유치원은, 지금은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으로 이름을 바꾼 '성심여대' 근처에 있었다.
유치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가끔씩 대학생 언니들을 볼 수 있었는데 어떤때는 귀엽다면서 손에 들고 먹고있던 초코렛을 조금 잘라서 주는 언니들도 있었다.

샛별유치원에 다니는 동안에 처음으로 젖니를 갈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 아래 앞니가 하나 빠졌는데 충격적이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해서 유치원에 가서 선생님에게 보여주고 자랑하느라고 하루종일 "이-" 하면서 봐달라도 하던 것이 기억난다.

이듬해 봄에 부천동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새로 받아온 교과서를 쌓아놓고 두 분 부모님께서 달력종이로 열심히 표지를 싸주시던 모습,
그리고
"국어"
"1-2"
"이지연"
하고 일일이 표지에 과목명과 이름을 큼지막하게 적어주시던 것이 똑똑하게 기억난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한 학년에 3반까지밖에 없었는데 나는 1학년 2반이었고, 담임선생님은 '노영숙 선생님'이었다. 나이는 30대 중후반 정도로 우리 엄마보다 좀 더 많았다.

학교에 가면 유치원과는 달리 뭔가 근사한 모습으로 교실에 앉아서 공부를 하리라고 잔뜩 기대에 부풀어서 갔는데 처음에 한동안은 아예 교실에 들어가지도 않고 운동장에서 줄서기와 '앞으로 나란히'만 연습하고 선생님이 앞에서 "하낫, 둘" 하면 우리는 "셋, 넷" 하며 따라다니기만 하라고 하여 좀 실망이었다.
교실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난 이미 한글을 다 떼고 웬만한 덧셈뺄셈도 다 할 줄 아는데 그제서야 '종합장'에다 색연필로 줄긋기나 하고 기역 니은을 배우고 있자니 심심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_-;

그래도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면서는 재미있게 공부했던 모양이다.
그때 썼던 그림일기장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내가 책상에 앉아 책을 펴놓고 있는 그림과 함께)
"공부가 너무 재미있다. 자꾸만 공부가 하고싶어진다... 어쩌구 저쩌구..."

지금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힐 정도이니 그때 선생님들은 오죽했을까.
내 일기장을 교무실의 모든 선생님들이 서로 돌려 봤대나 뭐래나...

내가 살던 곳은 버스도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시장을 보거나 병원에 가거나 하는 일은 모두 1km쯤 떨어진 역곡역까지 걸어가서 전철을 타고 오류동이나 영등포까지 나가야 했다.
그때는 수도권전철이 개통(1974.8.15.)된지 얼마 안되던 때라 나름대로 쾌적하고 편리한 교통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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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09 17:40 2001/03/09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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