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쯤 열심히 수능시험 문제를 풀고 있을 수험생들을 생각하니 13년전 대입학력고사를 치르던 그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고3이던 그 해부터 대학입시 제도가 많이 바뀌었다.
바로 전 해까지는 지금의 수능제도와 비슷하게 11월달에 자기 고등학교가 있는 지역의 시험장에 가서 시험을 보고, 그 성적을 토대로 가고자 하는 학교를 결정해서 원서를 접수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 해부터 갑자기 '선지원 후시험제'로 바뀌어 입학원서를 먼저 내고 지망하는 학교에 직접 가서 시험을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전에 없던 '주관식' 시험문제가 나오고, 시험도 11월이 아닌 12월 말에 보게 되어 이래저래 불만이 많았다. 아무래도 선지원 후시험으로 인한 '위험부담'이 커진데다, 하루빨리 수험생 신분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무려 한 달이나 더 수험생으로 있어야 된다는 것도 정말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1987년 12월 22일 나는 그렇게 내가 다닐 대학교 강의실에서 대입 시험을 치렀다.
다행히 합격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 학교는 내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던 학교는 아니었다. 그놈의 갑작스런 선지원 후시험제 때문에... '실적'을 염려하는 선생님들이 하도 겁을 주면서 이 학교에 (학과까지 지정해주면서) 원서를 내라고 종용과 회유를 하는 바람에... 재수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얼떨결에 가게 된 것이다... 그때 내가 고집을 부렸더라면 내 인생의 방향이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가끔 하게 된다... 후후... (그 방향이 좋은 방향인지 안좋은 방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처럼 포근한 날씨속에서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은 축복받은 것이다. 내가 시험보던 그날은 얼마나 추웠는지...
먼 곳에 사는 학생들까지 직접 학교에 와서 시험을 봐야 했기 때문에, 같은 강의실에서 시험보던 학생들 중에 귀 뒤에 멀미약 '키미테'를 붙이고 있는 아이도 몇 명 있던 것을 기억한다.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스팀'을 너무 세게 틀어줘서 얼굴이 벌개져 있던 것만 생각난다. 또, 엄마가 찰밥 도시락에다 인삼 달인 물까지 보온병에 넣어주신 것은 생각나는데 이상하게도 그걸 먹는 장면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밥을 굶었을 리는 없고... 아마도 너무 긴장한 탓에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른 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험이 끝나고 나서 어둑어둑한 저녁에 인산인해를 이루던 학교앞 좁은 언덕길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수원행 전철을 기다리던 - 자칫하면 철길로 떨어질만큼 사람들로 꽉 차있던 - 신도림역 플랫폼은 기억이 생생하다.

휴~ 별로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끔찍한 과정을 무사히 거친 내가 대견하게 느껴질 정도다... (^_^)
물론 오늘 시험을 마치는 수험생들도 대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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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15 16:43 2000/11/15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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