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냈더니 까마득히 잊고 있던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뒤이어 떠오른다.
1983년에는 처음으로 교복 자율화가 실시되어 그에 따른 에피소드들이 많았다.
익숙해 있던 검정교복을 어느날 갑자기 벗게 되자 다들 도대체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막막하고 난감해 했다. 초등학교때 입던 아동복 같은 옷을 입고 온 아이들과, 언니나 엄마가 입을만한 숙녀복 같은 어른스런 옷을 입고온 아이가 한 교실 안에 공존했다. 그렇잖아도 어른도 못되고 어린이도 못되는 어정쩡한 중학생들이니... 그 우스꽝스런 광경을 생각만 해도... 후후...
때맞춰 주니어패션과 스포츠 브랜드가 열풍을 일으키며 등장하긴 했지만, 그 덕분에 교복을 입을 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던 자본주의의 현실, 즉 빈부의 격차를 비로소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한창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죠다쉬 청바지와 나이키 운동화로 상징할 수 있는 '메이커 상표' 문화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을 입는 아이의 우월감이나 입지 못하는 아이의 열등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곤 했다.
JORDACHE 청바지를 입지 못하는 아이들은 JORDACHI나 JORDARHI(직접 발음해 보시라...)라도 입어야 하고, NIKE 운동화를 신지 못하면 NICE라도 신어야 할 정도로 아이들의 상표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귀밑 1센티 단발머리를 면하게 된 여학생들은 주로 커트머리를 하고 다녔는데 그때는 머리 전체에 층을 주어 옆으로 쓱 빗어넘기면 빗 자국이나 손가락 자국이 그대로 남는 '바람머리'가 대 유행이었다. 용이오빠(이용)나 영노기오빠(전영록)의 헤어스타일도 바로 그것이었다. 아.. 그들의 잠자리테 안경도 생각난다...
또 그때 유행했던 것으로는 스프링노트 연습장이 있었다. 누런 갱지나 모조지를 100장에서 200장 정도로 묶어 스프링을 끼운 노트인데 겉표지가 접착식 앨범 형태로 되어있고 그 '앨범'에는 스타의 사진이나 조잡한 그림의 시화가 끼워져 있었다. 대표적인 스타로는 조용필, 전영록, 브룩쉴즈, 소피마르소 등이 있었고 시화는 초원의 빛(여기 적힌 먹빛이 희미해진다면...), 삶(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등이 기억난다.
중학교 1학년 입학하던 날 처음 산 연습장에 바로 유치환의 '행복'이 들어있었는데 그 시를 보고 '으헉~ 시라는 게 이렇게 멋진거로구나...' 감탄을 하면서 보고 또 보고 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하는 첫 부분과 "사랑하는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하는 마지막 부분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또 그 해에 기억나는 것은 '사발면'의 등장이다.
거의 폭발적인 인기라 할 수 있었다.
라면을 먹으려면 일단 냄비가 필요하다는 것이 불변의 진리처럼 여겨지던 그때, 끓는 물만 부으면 바로 먹을 수 있다는 사발면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안먹어본지가 10년도 넘어서 요즘은 사발면 하나에 값이 얼마나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꽤 비싼 가격이었다. 보통 라면 하나에 100원 할 때였는데 사발면은 400원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도 방과후 학교앞 문방구 한켠에는 사발면을 먹고있는 아이들로 버글버글 했고, 심지어는 도시락 대신에 사발면을 가져와 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동네 가게에서 한 7~8살쯤 되어보이는 아이가 엄마에게 사발면 사달라고 떼쓰는 장면이 왜 내 기억속에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아참... 그무렵 '빵빠레'라는 아이스크림도 처음 나왔다. 흔히 먹던 '하드'라 불리던 아이스바와 '부라보콘'으로 대표되는 아이스콘만 존재하던 시절에 색다른 모양을 한 빵빠레의 등장도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왜냐하면 일단 크기가 훨씬 크고 값도 300원이라는 거금(!)이었으니까...
어휴.. 자꾸 새로운게 떠오르네... '죠스바'도 생각난다.
그 시대를 살은 사람이라면 다른건 몰라도 죠스바 정도는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도 나오는지...?)
겉은 까맣고 속은 새빨간... 요즘 말로 '엽기적'인 '하드'이다. 먹고나면 온 입안이 까맣게 물드는...
그러고보니 그 해에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군...
KBS에서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했던 것도, '이웅평 대위'가 미그기를 몰고 와서 귀순한 것도 바로 1983년이었다...
그게 17년전의 일이라는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1983년에는 처음으로 교복 자율화가 실시되어 그에 따른 에피소드들이 많았다.
익숙해 있던 검정교복을 어느날 갑자기 벗게 되자 다들 도대체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막막하고 난감해 했다. 초등학교때 입던 아동복 같은 옷을 입고 온 아이들과, 언니나 엄마가 입을만한 숙녀복 같은 어른스런 옷을 입고온 아이가 한 교실 안에 공존했다. 그렇잖아도 어른도 못되고 어린이도 못되는 어정쩡한 중학생들이니... 그 우스꽝스런 광경을 생각만 해도... 후후...
때맞춰 주니어패션과 스포츠 브랜드가 열풍을 일으키며 등장하긴 했지만, 그 덕분에 교복을 입을 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던 자본주의의 현실, 즉 빈부의 격차를 비로소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한창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죠다쉬 청바지와 나이키 운동화로 상징할 수 있는 '메이커 상표' 문화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을 입는 아이의 우월감이나 입지 못하는 아이의 열등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곤 했다.
JORDACHE 청바지를 입지 못하는 아이들은 JORDACHI나 JORDARHI(직접 발음해 보시라...)라도 입어야 하고, NIKE 운동화를 신지 못하면 NICE라도 신어야 할 정도로 아이들의 상표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귀밑 1센티 단발머리를 면하게 된 여학생들은 주로 커트머리를 하고 다녔는데 그때는 머리 전체에 층을 주어 옆으로 쓱 빗어넘기면 빗 자국이나 손가락 자국이 그대로 남는 '바람머리'가 대 유행이었다. 용이오빠(이용)나 영노기오빠(전영록)의 헤어스타일도 바로 그것이었다. 아.. 그들의 잠자리테 안경도 생각난다...
또 그때 유행했던 것으로는 스프링노트 연습장이 있었다. 누런 갱지나 모조지를 100장에서 200장 정도로 묶어 스프링을 끼운 노트인데 겉표지가 접착식 앨범 형태로 되어있고 그 '앨범'에는 스타의 사진이나 조잡한 그림의 시화가 끼워져 있었다. 대표적인 스타로는 조용필, 전영록, 브룩쉴즈, 소피마르소 등이 있었고 시화는 초원의 빛(여기 적힌 먹빛이 희미해진다면...), 삶(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등이 기억난다.
중학교 1학년 입학하던 날 처음 산 연습장에 바로 유치환의 '행복'이 들어있었는데 그 시를 보고 '으헉~ 시라는 게 이렇게 멋진거로구나...' 감탄을 하면서 보고 또 보고 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하는 첫 부분과 "사랑하는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하는 마지막 부분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또 그 해에 기억나는 것은 '사발면'의 등장이다.
거의 폭발적인 인기라 할 수 있었다.
라면을 먹으려면 일단 냄비가 필요하다는 것이 불변의 진리처럼 여겨지던 그때, 끓는 물만 부으면 바로 먹을 수 있다는 사발면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안먹어본지가 10년도 넘어서 요즘은 사발면 하나에 값이 얼마나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꽤 비싼 가격이었다. 보통 라면 하나에 100원 할 때였는데 사발면은 400원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도 방과후 학교앞 문방구 한켠에는 사발면을 먹고있는 아이들로 버글버글 했고, 심지어는 도시락 대신에 사발면을 가져와 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동네 가게에서 한 7~8살쯤 되어보이는 아이가 엄마에게 사발면 사달라고 떼쓰는 장면이 왜 내 기억속에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아참... 그무렵 '빵빠레'라는 아이스크림도 처음 나왔다. 흔히 먹던 '하드'라 불리던 아이스바와 '부라보콘'으로 대표되는 아이스콘만 존재하던 시절에 색다른 모양을 한 빵빠레의 등장도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왜냐하면 일단 크기가 훨씬 크고 값도 300원이라는 거금(!)이었으니까...
어휴.. 자꾸 새로운게 떠오르네... '죠스바'도 생각난다.
그 시대를 살은 사람이라면 다른건 몰라도 죠스바 정도는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도 나오는지...?)
겉은 까맣고 속은 새빨간... 요즘 말로 '엽기적'인 '하드'이다. 먹고나면 온 입안이 까맣게 물드는...
그러고보니 그 해에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군...
KBS에서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했던 것도, '이웅평 대위'가 미그기를 몰고 와서 귀순한 것도 바로 1983년이었다...
그게 17년전의 일이라는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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