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년시절

글모음/생각 2000/10/14 13:25 PlusAlpha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나는 아마 네 살이나 다섯 살때쯤 한글을 깨우친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은 아기가 첫돌만 지나면 한글공부는 물론 영어공부까지 시킨다던데...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비로소 한글을 처음 배우는 아이들이 훨씬 많았다.
그 덕분에 시골 동네에서 과분한 '천재 대접'도 받아볼 수 있었지만...

사실 나는 어렸을 때 또래에 비해 작고 어리고 약한 편이었기 때문에, 야생화같이 자라는 덩치 큰 동네 친구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가끔 친구들을 따라 술래잡기나 고무줄도 해보고 논둑 밭둑 다니며 메뚜기, 개구리 잡는 일도 해봤지만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잘 해야 재미가 있지...)
내 취미는 방 안에서 달력종이 펼쳐놓고 그림그리고 글씨쓰고 라디오 듣고... (그래서 70년대 추억의 노래에 좀 각별한 정을 느낀다.)
좀 지나서는 동화책 읽고... 그런 것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고모는 나를 데리고 어디 가서 남에게 자랑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특히 아버지를 따라 이발소에도 자주 갔고 일요일날 직장에 당직이 있을 때는 사무실에 가기도 했다.
이발소처럼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사람들이 나에게 신문을 펼쳐놓고 아무 글자나 짚어가면서 읽어보라고 하고, 불러주는 글자를 써보라고도 하고, 노래를 시켜보기도 하고는 신기하다고 기특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동전을 쥐어 주곤 했다. (요즘에는 애들한테 이런 것 시켜보는 사람 없겠지...)

나중에는 휴일에 아버지의 사무실에 가는 것을 내심 기대하고 즐겼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타자기라는 훌륭한 장난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종이를 타자기에 끼워주시면 나는 여러가지 글자들을 더듬더듬 찍으며 놀았다.
'찰칵 찰칵'하며 글자가 찍히는 소리와 한 줄을 다 찍고나면 울리는 '땡' 소리가 무척 재미있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카세트테이프 레코더를 사오셨다.
굳이 크기를 비교하자면 A4용지만한 크기였고 녹음, 재생, 빨리감기, 되감기 기능만 있는 아주 단순한 모델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매우 신기한 물건이었다.
아버지가 우리(나와 동생)에게 마이크를 대 주며 노래를 해보라고 했다. 나는 얼마전 새로 배워 관심이 많던 찬송가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를 비롯한 몇 곡을, 내 동생은 시대의 유행곡 '새마을노래'를 불렀다.
그날 녹음된 테이프는 지금도 잘 모셔져 있다. 앞뒷면 합쳐 15분밖에 안되는 짧은 테이프라 좀 아쉽지만 아주 소중한 물건이다.
그 이후 그 녹음기는 우리의 장난감이 되다시피 하여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나와 동생의 시시한 말장난 들이 새마을노래 뒷부분에 수도 없이 겹쳐져 녹음되어 있다.

내가 지금도 기계종류를 겁내지 않고 매뉴얼만 보고도 비교적 척척 잘 다루는 편에 속하게 된 것은 이렇게 어릴때부터 '신기한 기계'를 자주 접하게 해준 아버지 덕분이 아닌가 한다.

내가 아는 사람중에 '기계치'인 사람이 있다.
하루는 그가 혼자 집을 보게 되었는데 한 번도 보일러를 만져본 적이 없어서 아무리 더듬어보고 눌러 보고 해도 어떻게 켜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고... 그래서 한겨울에 냉방에서 덜덜 떨며 잤다고 한다...!
이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여성들이 기계에 약한 게 사실이다. '여자란 원래 기계에 약해'라는 고정관념때문에 기계에 접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기 때문은 아닐지...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동생이 '미운 일곱 살' 장난꾸러기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주 사이좋은 남매였다.
동생을 늘 "아가야!" 라고 부르며 귀여워했다.
동생이 유치원에 입학하는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제는 "아가야"라고 불서거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름을 불러주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는 비록 역사적 사회적으로는 암울한 시기였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가장 마음 편하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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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0/14 13:25 2000/10/1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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