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1

글모음/생각 1997/12/25 01:04 PlusAlpha
정말 지독한 감기 몸살이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몸살을 앓으며 다 보내고 말았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저녁, 나는 서울대병원 정문 앞에 있는 한 약국을 찾아갔다. 엄마의 약을 사기 위해서다. 한달치에 수십만원이나 하는, 암환자의 면역력을 높여준다는 그 약을 조금이라도 싸게 사기 위해 몇 사람을 거쳐 '아는' 아저씨가 계신다는 그 약국까지 가야만 했다. 그 얼굴도 잘 모르지만 '아는 아저씨'인 최부장님을 찾았더니 벌써 퇴근하셨다고 한다. 거기 있는 다른 분에게 간신히 사정해서 원래 얘기되었던 싼 가격으로 그 약을 받아들고 서울대병원 안으로 들어선다. 4호선 혜화역까지 가려면 어쩔수없이 병원 가로질러 후문으로 나가야 한다. 아직 저녁을 때우지 않은 것을 깨닫고 어린이병동 안에 있는 버거킹에 들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햄버거가게 버거킹이다. 지난 여름 엄마가 입원해 계실 때 매일같이 가던 버거킹... 어쩐지 병원 식당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아 매일 버거킹에 가서 모든 메뉴를 번갈아가며 먹었었지. 하루는 와퍼, 다음날은 치킨버거, 다음날은 피쉬버거... 엄마는 병원 침대에 누워서도 얘, 그런건 몸에 안좋다던데 밥을 먹어야지... 하고 걱정하셨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버거킹에는 어린이 환자가 유난히 많았다. 휠체어에 앉아 링거 바늘을 팔에 꽂고 있는 조그만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줄 길은 버거킹에 데리고 가서 먹고싶어하던 햄버거와 포테이토를 사주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병원 안에 그런 가게라도 있는게 얼마나 다행인가.

크리스마스 이브의 병원 풍경을 본 적이 있는가?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환자들의 외로운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아니, 상상해 본 적이라도 있는가?

버거킹 한 구석에 혼자 앉아 와퍼를 씹고 있다가, 나와 똑같이 크리스마스 이브의 저녁식사를 병원 구내 패스트푸드점에서 혼자서 때우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눈길이 마주쳐 동병상련의 정을 느낀다. 나는 눈물과 콧물을 쏟아낸다. 에잇... 훌쩍. 이놈의 감기 때문에... 훌쩍. 사실은 감기 때문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때마침 감기에 걸려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렇지 않으면 난 크리스마스날 눈물이나 짜고 있는 비참한 인간이 되어 있었겠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날이 나에게 1년중 가장 바쁜 날이었는데.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행사 때문에 이리뛰고 저리뛰고 성가대 연습도 하고 아이들 데리고 노래연습도 시키고 연극연습도 시키고...
나에게 설마 이런 크리스마스가 찾아올줄이야....

집에 돌아와 사온 약을 꺼내보니 전에 먹던 것과는 어딘가가 다르다. 같은 회사의 같은 이름의 약이었지만 포장도 약간 다르고, 내용물도 조금 달랐다. 자세히 보니 상자에는 "보험용"이라고 적혀있었다. 이런... 그 아저씨는 나에게 선심쓰는 척 하면서 그 값에 맞는 싼 약을 내어 주었던 것인가. 젠장.
터무니없이 높은 값을 받는 것도 문제이고, "일반용"과 "보험용" 약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도 문제다. 화가 난다.

그리고나서 나는 지금까지 끙끙 앓고 있다.
감기몸살이 나으면 우울증도 사라지려나...?
온 몸이 아프고 마음까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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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2/25 01:04 1997/12/25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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