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 '쇼와시대의 일본 대학생 대백과사전' 昭和の大學生大百科 pp.4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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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0년대 일본학생운동의 개요

60년대는 학생운동으로 밝았다가 학생운동으로 저문 10년이었다. 그 배경은 일본이 전후의 빈곤에서 벗어나 경제 고도성장으로 발전하는 과도기에 있었고 물질적으로 다소의 여유를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람들의 기분으로 전이되어 물밑에서 정치 이탈이 진행되던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그 이전 경제적 빈곤이 남아있던 무렵에는 사람들의 정치의식이 나름대로 유지되었고 부분적으로는 날카로웠으나 경제고도성장이 궤도에 오른 1970년 전후가 되자 그 의식은 놀랄만한 속도로 퇴조하여 그대로 물질적 욕구로 빗나가고 말았다.

안보반대투쟁

60년대의 개막을 장식한 것은 ‘60년 안보(안보반대투쟁)’를 이끈 ‘전학련(全學連, 젠가쿠렌)’의 등장이었다. 이 단체의 정식 명칭은 ‘전국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全國日本學生自治會總連合’이었다. 60년대 안보문제는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과 동시에 체결된 안보조약, 즉 ‘미일안보조약’의 개정을 놓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대운동이 전개되고 그것이 국론을 분열하게 된 사건이다. 이 안보조약 중에는 ‘미.일 지위협정’이라는 규정이 있어 오키나와沖繩에서 일어난 미군범죄사건 수사의 걸림돌이 되는 등 오늘날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또한 안보조약을 추진한 수상이 전전(戰前)에 관료까지 지낸 키시 노부스케岸信介였던 점도 대중의 반감을 사, 안보반대 기운을 드높이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60년 안보투쟁에서 일세를 풍미한 전학련이었지만, 이 단체는 그 이전부터 큰 문제를 갖고 있었다. 전후(戰後)의 학생운동은 주로 일본공산당의 지도를 받았는데, 내부에서는 그 지도법에 의문을 갖는 사람이 많았고 1958년에 공산당에서 제명당한 활동가를 중심으로 '분트(ブント, Bund, 공산주의자동맹, 역주 : 동맹, 연합 등을 뜻하는 독일어에서 온 말)가 결성되었다. 이것이 공산당(요요기파代代木派)에 대한 ‘반(反)요요기파’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요요기파'는 후일 민청(民靑, 민세이)으로 이어졌고 '반요요기파'는 후일의 신좌익(新左翼, 신사요쿠)으로 이어졌다. '분트'가 주도하는 전학련全學連은 여러 차례 경찰과 충돌했다. 운동의 와중에 도쿄대東京大생인 칸바 미치코樺美智子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아울러 학생 데모대의 국회돌입으로 발전되어 운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분파투쟁, 그리고 전공투

‘안보투쟁’ 패배후 '분트'는 운동방침등을 놓고 내부대립을 일으켜 조직적으로 해체의 길을 걸었다. 그 일부는 '분트'와 별개의 반요요기파 조직인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日本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革共同全國委員會派라 불린 조직)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 조직은 1963년에 ‘츄우카쿠파中核派’와 ‘카쿠마루파(革マル派, 革明 Marx 派)’로 분열되었다. 그 이후, 학생운동은 물꼬가 터진 듯 조직의 분열과 이합집산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이 조직들은 ‘섹트(セクト, sect)’라고 불렸으며 운동은 갈수록 과격해졌다. 이 시기에 그들은 자기들의 조직을 지키기 위하여 ‘당파투쟁(內ゲバ, 우치게바, 역주 : 조직내부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동반한 대립,항쟁)’라 일컬어지는 을 계속했다. 그들중에는 당파투쟁도 운동을 위한 ‘필요악’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와 논리로 연설했기 때문인지 일반 학생으로부터 고립되어 운동은 정체되었다. 이 정체를 타개한 것이 케이오오慶應와 와세다早稻田 등 대학의 학비인상, 학생회관 관리운영을 둘러싼 대학당국과 학생자치회의 대립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많은 일반학생을 끌어들여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학내분쟁으로 시작됐으나 곧 안보 재개정 등 정치문제와 연동되어 도쿄대, 쿄오토오대京都大, 니혼대日本大 등 전국 각지의 대학으로 파급되었다. 각 대학에는 ‘전학공투회의全學共鬪會議’ 즉 ‘전공투(全共鬪, 젠쿄오토오)’가 결성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운동을 중심적으로 지원했던 것이 앞서 설명한 ‘섹트’의 학생활동가였고 그들은 폭력적 가두행동의 주역이었다. 그들이 헬멧을 쓰고 각목을 든 모습은 이 시대의 풍속도이기도 했다.

전투를 위한 전투복과 전술

60년대, 운동이 활발해짐과 동시에 학생운동은 특유의 스타일을 갖기 시작했고 풍속이나 패션의 일부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60년 안보투쟁 시절, 학생들의 스타일은 대부분 양복 스타일의 재킷 내지는 차이나칼라 스타일의 학생복이었다. 섹트의 학생활동가도 언뜻 봐서는 일반 학생과 차이나는 모습을 하지는 않았다. 투쟁스타일도 투석은 드물었고 각목등을 갖고다니는 일은 더더욱 없었으며 기껏해야 플래카드를 휘두르는 정도였다. 데모대는 경찰대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때 국회 기자를 하던 A씨에 따르면 “국회 경비는 정면만 하고 측면은 비어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학생들은 측면공격을 하지 않았다. 호의적으로 표현하자면 정정당당했던 것이다. 상대편 경찰대는 제복에 철모를 쓰고 있었는데 후일의 ‘기동대(機動隊)’라 불린 정예부대가 착용한 ‘난투복’은 아니었다. 쌍방에 암묵적인 룰이 있었으나 정부의 일부에서는 자위대의 치안출동을 검토했다고도 한다. 참고로 그 당시 일반 학생은 ‘논포리(ノンポリ, non-politics)’라고 불리었다. 이는 본래 정치에 무관심한 학생들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안보투쟁’은 그러한 무관심층까지 정치의 세계로 끌어들일 정도로 막강했다.

‘섹트’별 색깔로 자기주장

분파투쟁에 의한 사분오열의 영향이 각 섹트의 활동가는 손에 각목을 들고 경관대의 곤봉공격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똑같이 헬멧을 썼는데, 헬멧에는 자기 파(派)의 표시를 해놓았다. 츄우카쿠파中核派는 흰색으로 ‘中核’라는 글자를 썼으며, 츄우카쿠파와는 대립관계에 있던 카쿠마루파革マル派는 ‘Z’ 마크를 새겼다. 그리고 샤세이도오카이호오파社靑同解放派라는 섹트는 파란색 헬멧에 ‘反帝學評’(반 제국주의 학생 평의회, 反帝國主義學生評議會)라고 적었다. 샤세이도오社靑同란 정식명칭 ‘사회주의 청년동맹社會主義靑年同盟’으로 당시 사회당(社會黨, 샤카이토오)의 하부조직이었다. 이 분야에 정통한 정보원에 따르면 ‘카이호오파解放派’는 사회주의청년동맹에 가입전술을 취하여 세력확대를 꾀했다고 한다. 또한 60년 안보투쟁에서 용맹을 떨친 '분트'는 붉은 헬멧을 쓰고 나타났으며, 그밖에 검은 헬멧도 등장했다. 아나키스트의 상징 ‘검정색’을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 그밖에 무수한 섹트가 분파하거나 새롭게 생겨났다.

수건으로 복면하고 교문과 건물을 바리케이드로 봉쇄

섹트에 관계없이 학생들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기동대가 발사하는 최루탄 가스로부터 눈과 코를 보호하는 것이고, 둘째, 데모할 때 얼굴이 노출되지 않도록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경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하여 불가결한 대응이었다. 이 무렵, 케이오오와 와세다 등에서 잇따라 학비인상을 발표했는데 학생들이 이에 심하게 반대했다. 그러한 움직임을 계기로 하여 ‘비정치권(논포리)’ 학생들을 끌어들인 학원분쟁이 불을 뿜었다. 학원분쟁에서는 학생자치회가 주도하여 학생대회를 소집하고 스트라이크를 결의하였다. 스트라이크라고는 해도 노동자의 경우와는 달리 1964년부터 1965년까지 케이오오와 와세다가 총학생스트라이크에 돌입했고 그 후 도쿄대, 니혼대, 쿄오토오대, 도오시샤대同志社大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학교 건물을 폐쇄하고 수업을 거부하는 전술로 치고 나왔다. 그 목적은 대학으로서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책상과 의자 말고도 건물내의 집기를 총동원하여 교문과 건물의 입구에 쌓아올려 그것을 철사나 밧줄로 둘둘 감아놓았다. 바리케이드는 어느새 간단히 무너질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학생들은 의지단결하여 바리케이드 안에서 농성했다. 바리케이드 안은 국가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해방구’가 되었다. 그러나 기동대의 끊임없는 바리케이드 해제에 긴장하고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와세다의 경우 봉쇄는 늦가을에 시작되어 이듬해 봄까지 계속되었다. 침구와 침낭을 가지고 와서 숙박을 했다. 한겨울에는 학교 건물 앞 관장에서 철제 쓰레기통에 불을 피워 추위를 견디었다. 음식 재료를 가져다가 직접 만들어먹기도 했다. 그러한 자잘한 일은 잊혀지기 쉽지만 실로 투쟁이 일상화되어가는 과정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2. 도쿄대 투쟁과 니혼대 투쟁

운동의 절정을 이룬 도쿄대 투쟁

1968년 한겨울, 도쿄대 의학부가 스트라이크에 돌입했다. 스트라이크를 지휘한 의학부 전학 투쟁위원회(총학생회)는 豊川 학장 및 春見 의국장과 대립했다. 대학 당국은 17명의 대량 제명처분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사태는 일거에 악화되었다. 학생들은 졸업식 저지로 나갔으며 동경대의 상징이라할만한 야스다安田강당을 점거했는데 기동대 도입으로 곧 해산되었다. 그러나 이는 불에 기름을 붓는 일이었다. 학생측은 법학부 이외의 전 학부에서 항의집회를 열고 총장단체교섭을 요구했다. 이것이 결렬되자 학생들은 야스다 강당을 재점거하고 '전공투全學共鬪會議'를 결성하여 ‘자기부정自己否定’과 ‘도쿄 제국대학 해체帝大解體’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도쿄대의 전공투 의장인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씨는 물리학, 특히 소립자론의 심연을 탐구하려던 청년이었다.(그는 나중에 『知性の反亂』등 물리학에 관한 많은 전문서를 저술하였고 현재도 학자로 활약하고 있다.) 당시 도쿄대의 '전공투'는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엘리트들이 외치는 구호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냉소적인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운동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들의 주장에는 일본을 지탱해 온 엘리트 스스로가 일본이라는 체제 자체에 내포되는 모순을 고발하는 자각이 있었다. 현재 모 대기업 간부직에 있으며 당시 투쟁에 참가했던 K씨는 “스스로의 신념으로 참가했다”고 전제한 뒤 “의학부 분쟁에 관한 대학당국의 대응에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 무책임하고 눈가리고 아웅하는 사고방식이 전전(戰前)부터 폐단을 이끌어 온 것이며 국민의식에 뿌리내리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반드시 변혁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지금이라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라고 말했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의식은 엘리트라는 점이야말로 도쿄대투쟁은 전국의 학원투쟁의 절정을 이루는 대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투쟁을 보여준 니혼대 투쟁

니혼대투쟁은 도쿄대투쟁와 함께 60년대 학생운동의 정점이 된 투쟁이었다. 1968년 2월 국세청이 니혼대의 20억엔 용도불명의 비자금을 적발했다. 대학당국의 난맥 경리에 대한 학생들의 항의의 물결이 니혼대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해 봄, 학생의 항의행동은 더욱 고양되어 학생과 앞에서 대규모 데모가 일어났다. 이에 대하여 대학당국은 용도불명의 비자금에 대한 설명을 일체 하지 않고 데모를 선동한 15명의 제명처분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도쿄대때와 마찬가지로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1만명을 넘는 학생들은 궐기대회를 열고 '니혼대 전공투日大全學共鬪會議'를 결성했다. 그러나 그 후의 전개는 도쿄대와 달랐다. 대학 당국은 체육회 쪽의 학생을 중심으로 우익학생을 동원하여 전공투계 학생에게 백주테러를 포함한 폭력공격을 개시했다. 이에 대하여 전공투는 우익의 공격에 위축되기는커녕 역습에 나서 각 학부의 건물을 바리케이드로 봉쇄하고 스트라이크를 결행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긴박해졌기 때문에 대학 당국은 전공투와의 대중단체교섭에 응했다. 그리고 학생 3만명 앞에서 이사 전원의 퇴진을 포함하여 양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당시의 사토오佐藤 수상이 대중 단체교섭의 결과에 개입하는 자세를 보였다. 이에 힘을 얻은 대학당국은 학생과의 약속을 어기고 단체교섭도 거부했다. 이렇게 되자 투쟁은 지구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우익은 도끼나 일본도 같은 흉기로 무장하고 학생에 대한 습격을 반복했으나 학생들을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전공투에 참가한 학생의 대부분은 섹트와 관계없는 일반 학생이었고 ‘논섹트래디컬(ノンセクトラジカル, non-sect radical)’라고 불렸다. 나혼대투쟁은 이제까지의 대학분쟁에는 보이지 않았던 양상을 보였는데 그것은 룰(rule)이 없는, 말 그대로 생명의 위험에 처한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 투쟁에서는 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나왔다. (이 나혼대투쟁을 지휘한 전공투 의장 아키타 아케히로秋田明大씨는 그 후 고향에 돌아가 자동차 정비공장을 경영하고 있으며 『獄中記』와 『大學占據の思想』 등을 저술한 바 있다.)

3. 70년 안보투쟁

국제 반전(反戰)의 날 혼란

1968년 이후에는 대학의 틀을 넘어선 큰 사건이 주목을 받았다. 그중에서 하나의 큰 화제가 된 사건은 1968년 10월 21일의 ‘국제 반전의 날’일 것이다. 그 무렵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어 일본에 있는 미군기지를 경유하여 대량의 무기와 탄약, 병력이 전쟁터로 수송되었는데 이때 베트남 반전운동의 일환으로 큐우슈우九州의 사세보항佐世保港에서는 미군 잠수함 엔터프라이즈 호의 정박 저지를 요구하는 학생 데모가 전개되었다. 이날 오후부터 신주쿠新宿역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한 학생은 저녁부터 밤까지 2~3만명으로 늘어났다. 이미 다수의 기동대가 동원되어 여기저기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갑자기 역 주변을 중심으로 혼란상태에 빠졌다. 심야에 데모대는 신주쿠역을 점거했다. 이에 대하여 경시청은 ‘소란죄’를 적용하여 기동대가 데모대를 진압했다. 한편 롯폰기六本木의 방위청을 비롯하여 국회와 코오지마치麴町 경찰서 등에서도 학생과 경관대가 충돌했다. 수도의 소란은 섹트의 활동가가 진두에 나서기는 했지만 논포리라고 불린 비정치권 일반 학생의 참가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첨예화된 오키나와 복귀문제

이듬해인 1969년에는 이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오키나와沖繩 반환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다. 오키나와에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조국복귀운동이 계속되었는데 그것을 전국적인 운동으로 전개한 것이 ‘4.28 오키나와 데이’였다. 베트남 전쟁의 가장 유력한 후방병참기지로서의 입지에 있었던 오키나와가 본토의 반전운동과 연동하는 의미는 컸다. 때마침 안보재개정이 임박해 있었고, 또한 오키나와 반환에 관한 골자는 1969년 말의 사토오佐藤수상과 닉슨 대통령 사이에서 결정되기로 되어 있었다. 이는 정치일정으로 밝혀져 있었기 때문에 학생운동에서 70년 안보투쟁의 결전의 무대로서 자연스럽게 오키나와가 부상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흐름에 의하여 섹트의 학생활동가가 운동의 주체가 되지 않을 수 없었고, 논포리 학생은 운동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전국 전공투 연합’과 ‘산리즈카투쟁’

69년 가을, 학생운동의 쇠퇴를 멈추게 할 ‘전국 전공투연합 결성대회’가 열렸다. 의장으로는 도쿄대 전공투의 山本義隆, 부의장에 나혼대 전공투의 秋田明大를 선출했다. 이 대회는 학생운동 재활성화의 기폭제가 될 것으로 크게 기대되었으나 그 실정은 신좌익 8개파의 정치적인 힘의 균형 위에 성립된 것에 불과하여 운동체로서의 지도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생각대로 투쟁의 현장에 있는 각 대학에서는 점차로 기동대 도입에 따라 바리케이드가 철거되고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일부에서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으나 전국 전공투는 반격의 주체로서의 역량을 상실해 있었다. 한편, 강경하고 끈질긴 운동을 전개한 것은 ‘산리즈카三里塚투쟁’이었다. 당시 정부는 수도권에 국제공항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佐藤수상은 당초 산리즈카에 가까운 富里를 공항예정지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농민의 2년 넘는 맹렬한 반대운동이 있어 철회했다. 계획은 공중에 뜨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정부는 급거 비밀리에 산리즈카를 예정지로 하기로 각의결정하였다. 물론 산리즈카의 농민에게 사전 상담은 없었다. 너무나 일방적인 결정이어서 날치기같은 정부의 처사에 대하여 산리즈카농민은 분노했다. 그리고 토무라 잇사쿠戶村一作씨를 지도자로 ‘三里塚-芝山連合공항반대동맹’이 결성되었고, 이후 장기전이 계속되게 되었다. 이 공항건설반대운동에는 많은 학생이 참가하여 목숨과도 같은 토지를 갑자기 빼앗기게 된 농민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투쟁속에서 보여준 강인함과 신념에 감동하여 각성하였다. 농민의 생활과 장래를 건 산리즈카투쟁은 전공투 운동의 쇠퇴와는 대조적으로 30년후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최종적인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상승한 투쟁

이 무렵 학생운동은 질적인 전환에 임박했다. 그것을 상징하는 섹트는 ‘적군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가두투쟁에서는 화염병이 날아다니긴 했지만 적군파등의 초과격파 섹트는 운동을 ‘전쟁’으로 규정하여 공공연히 위법 투쟁을 전개하고 자금조달을 위해 금융기관 습격은 물론 파출소 습격 등의 게릴라전에 돌입했다. 그리고 일본항공기 ‘요도호よど號 납치사건’을 일으켜 북한으로 도망했다. 그 후 이 섹트는 분파하여 ‘연합적군’은 국내에서 무장봉기하여 동지를 숙청(살해)하였다. 또한 어떤 사람은 아랍 세계에서 활로를 열고자 했다. 2001년 간부인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가 귀국하여 체포된 바 있다. 이상 서술한 것 이외에도 수많은 사건이 있었고 사람이 있었으며 각자 이야기할만한 가치를 갖고 있을 것이나 그것을 역사에 어떻게 각인하는가는 당시 운동에 관련된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에 달려있다. 1970년 6월 23일, 안보조약은 두 번째 개정되어 오늘날에도 기능하고 있다.

4. 학생운동의 쇠퇴

내분에 의한 자멸

60년대, 즉 60년대 후반의 학생운동은 결국 쇠퇴와 붕괴의 길에 이르렀다. 게다가 그 후 완전히 그림자를 감추어 이제는 과거의 역사로서의 평가도 사라지고 있다. 사실 거기에는 비교적 분명한 이유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분에 의한 자멸’이다. 당시 추우카쿠파中核派와 샤세이도오社靑同(解放派), 그리고 '분트'의 학생조직이었던 샤가쿠도오社學同(社會主義學生同盟)의 3파가 연합하여 카쿠마루파革マル派와 심하게 대립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피로 피를 씻는 격렬한 투쟁을 반복했다. 또한 1971년부터 1972년까지 ‘렌고세키군連合赤軍’사건이 발생하였고 그중 돌출된 사건은 ‘아사마淺間산장사건’이었다. 1972년의 한겨울 군마현群馬縣 묘오기산妙義山에 숨어있던 연합적군의 탐색을 위해 경관대는 3,000명을 동원했고 나가노현長野縣 카루이자와輕井澤의 별장지에서 연합적군 멤버 5명을 발견했다. 이 멤버는 총을 난사하고 도주하였고 그 후 카루이자와輕井澤의 카와이악기河合樂器의 기숙사 ‘아사마淺間산장’에 침입하여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삼아 농성했다. 즉시 경관대가 포위했다. 농성하던 멤버들은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경관대와 격렬한 총격전을 벌였다. 경관대는 살수(撒水)는 말할 것도 없고 대형 크레인에 매단 쇠뭉치로 건물을 부수는등 강경수단을 취했다. 그리고 사건발생으로부터 열흘, 격렬한 공방의 끝에 연합적군 멤버 5명을 체포했다. 이 사건은 이제까지의 학생운동에 대한 세간의 시선을 일거에 뒤집었다. 그 후 멤버들이 운동을 함께 한 동료를 14명이나 살해한 사실과 너무나도 처참한 그 “처형”의 진상이 밝혀졌다. 살해이유도 거창한 ‘사상이나 윤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소한 트집을 잡아 처형한 것이었다. 거기서는 인간으로서의 지성이나 동정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생물로서 지켜져야 할 최저한의 룰조차 지켜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른바 외부의 적이 아닌 자신의 마음과의 싸움으로 자멸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해 5월, 일본적군에 의한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에서의 난사사건, 전년에 일어났던 요도호よど號 납치사건 등 대학의 투쟁은 학원 밖으로 나와 학생들과는 더 이상 인연이 없어졌다. 많은 대학생이 그렇게 느꼈을 때 시대의 바람은 바뀌었다.

참고자료

[주간한국 기사 2000/11/21 일본적군파1]

11월8일 니혼세키군(日本赤軍)의 최고 간부인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ㆍ55)가 오사카(大阪) 다카쓰키(高槻)시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1974년의 헤이그 사건으로 국제 수배된지 26년만이었다.
도쿄(東京)경시청으로 이송되던 도중 보도진의 카메라에 잡힌 그의 모습은 한때 세계를 떨게 했던 테러집단의 카리스마적 '여제'(女帝)나 여전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멀리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주부나, 약간은 고생을 한 동네 중년 아주머니의 모습이었다.
이런 그의 검거를 미국 대통령 선거로 정신이 없던 가운데서도 일본 언론은 대서특필했다. 국외 잠복중인 것으로 여겨졌던 그가 일본에서 검거된 놀라움도 컸지만 무엇보다 그의 검거가 한 시대의 종막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에서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말은 옛날 책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됐다. 노동계급의 전위 정당을 자임했던 일본 공산당조차 11월20~24일의 당대회에서 규약을 개정,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의 탈바꿈을 모색하려는 상황이다.
일부 대학에 '가쿠마루'(革マル)를 비롯한 과격파 동아리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명맥을 잇는 것이 최대 과제일 정도이다. 그러나 1960년대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일제 군군주의의 혹독한 탄압에 시달린 일본의 공산주의 운동은 패전후 최대의 탄압수단이던 치안유지법의 철폐로 모처럼 개화기를 맞았다.
그러나 소련과의 냉전에 따른 연합군사령부(GHQ)의 정책 변화로 이내 비합법 공간에 갖혀야 했다. 1960년 미일 안보조약의 개정에 반대하는 '안보 투쟁'은 모처럼 마련된 탈출구였다.
그 해 6월4일 560만명이 참가한 총파업이 전국을 흔든 데 이어 15일에는 580만명이 참가한 총파업이 이뤄졌다. 더욱이 같은 날 학생시위대가 국회를 점거, 경찰이 이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도쿄대 학생이던 시라카바 미치코(樺美智子)가 숨졌다. 때마침 구미를 휩쓸던 신좌파(New Left) 운동의 격랑 속에서 일본의 대학가에는 학생운동의 열풍이 몰아쳤다.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한 것은 일본 공산당 좌파의 영향 하에 있던 여러 학생 동맹, 일본 공산당과는 간접적 관계에 머물렀던 공산주의자동맹(Bund) 산하 젠가쿠렌(全學連) 계열의 동맹ㆍ연맹, 일본 사회당(현 사민당)의 영향 하에 있던 사회주의 청년동맹의 각종 단체 등이었다.
이들의 조직과 노선은 극히 다양해 당파간 노선 싸움과 무력 투쟁이 그치지 않으면서 차츰 일반 대중과는 거리가 멀어져갔다.
이같은 당파성은 1965년 이후 등록금 인상, 교원 임용 문제 등을 둘러싸고 전국 대학의 교내 투쟁을 주도한 전학공투회의(全共鬪)에 의해 극복되는 듯 했다.
당파를 초월한 학생 운동의 중심으로 각 대학에 잇달아 발족한 전공투에는 기존의 각종 조직원 뿐만 아니라 일반 대학생이 대거 참여했다. 한창 때인 1968년 말 전공투는 전국 116개 대학에서 교내 분쟁을 일으켰고 15개 대학을 점거했다.
특히 1968년 7월부터 전공투에 점거된 도쿄대학의 야스다(安田) 강당은 전공투 운동의 상징으로 통했다. 1969년 1월18일 저녁에 8,500명의 경찰기동대가 동원된 공방전은 다음날 야스다 강당이 불타면서 막을 내렸다.
전공투는 이해 9월 전국전공투연합을 발족, 재기를 시도했으나 당파간의 노선 투쟁이 중시되는 상황이 학생 다수의 외면을 불러 그 이름이 사라졌다.
대학내의 대중적 참여를 가능하게 했던 전공투 운동의 붕괴는 학생운동의 소수ㆍ과격화를 불렀다.
치열한 노선 싸움과 내부 충돌, 존재 과시를 위한 경찰서 등 공공 시설의 습격ㆍ방화가 잇따른 가운데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共産同赤軍派)의 무장투쟁 노선이 부각됐다.
1967년 공산주의자동맹 전국대회에서 당시 교토(京都)대 학생이던 정치국원 시오미 다카야(鹽見孝也)가 '국제주의와 조직된 폭력'이라는 장문의 논문을 통해 "혁명은 전투적 대중운동이 아니라 조직된 폭력, 즉 훈련된 군에 의해서만 달성된다"고 주장, 신좌익 각파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이듬해의 공산동 전국대회는 시오미의 논문에 동조하는 간사이(關西)파와 반대하는 간토(關東)파의 동서대립으로 격론이 빚어졌고 결국 간사이파는 1969년 '공산동 적군파'로 독립했다. 의장은 시오미가 맡았고 메이지(明治)대 학생 시게노부가 중앙위원겸 조직부국장으로 떠올랐다.

[주간한국 기사 2000/11/28 일본적군파2]

1970년 3월의 요도호 납치사건으로 적군파는 그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도쿄(東京) 하네다(羽田)발 후쿠오카(福岡)행 일본항공(JAL) 여객기인 요도호를 공중납치한 9명의 적군파 대원은 김포공항을 거쳐 평양으로 날아갔다.
해외 거점을 확보, 군사훈련을 거친 후 일본은 물론 세계 동시혁명을 겨냥한다는 시오미의 '국제 근거지론'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해외거점의 최우선 후보지로 꼽혔던 북한은 이들에 대해 특별한 환영을 베풀지 않았다.
그 결과 중동이 새로운 후보지로 떠올랐고 1971년 2월 시게노부 등 19명이 레바논으로 날아갔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가장 급진적 단체인 팔레스타인해방 인민전선(PFLP)과 연대, 베카고원을 거점으로 '적군파 아랍지부'를 발족하고 군사훈련과 이스라엘과의 투쟁에 나섰다.
아사마(淺間)산장 사건으로 일본 국내의 적군파가 맥이 끊기자 이들은 적군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아랍 세키군(赤軍)'을 자칭했으나 '니혼 세키군'(日本赤軍)이란 이름이 훨씬 널리 쓰였다.
일본 국내의 적군파는 주요 지도자들이 잇달아 검거되고 수사망이 좁혀 드는 가운데 1971년 7월 공산당계 지하조직인 인민혁명군과 결합, '렌고 세키군'(連合赤軍)을 결성했다.
이들은 경찰에 쫓겨 군마(群馬)현과 나가노(長野)현의 산악 지대를 떠돌았으며 아사마 산장 사건을 끝으로 완전히 맥이 끊겼다.
1972년 2월19일 마지막 렌고 세키군 5명은 아사마 산장에서 인질을 잡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대치했다. 28일 경찰 특공대가 돌입, 5명을 체포하기까지 경찰 1명이 숨지고 25명이 부상했다.
경찰 조사과정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초겨울에 내려진 소집령에 따라 산악지대에 모인 29명중 14명이 내부 처형된 것으로 드러났다. 자아비판 과정에서 연애 경력 등을 이유로 동료를 간단히 죽음으로 내몰고 임신부까지 처형한 극한적 잔혹상에 일본 국민은 치를 떨어야 했다.
중동의 니혼 세키군은 1972년 5월 3명이 자동소총을 난사, 여행객 24명을 살해하고 76명을 부상시킨 텔아비브 공항 사건을 계기로 한동안 아랍의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이후에도 3명이 주네덜란드 프랑스대사관을 무장 점거, 대사 등 11명을 인질로 잡고 프랑스에 수감된 동료를 석방시킨 1974년의 헤이그 사건 등 크고 작은 11건의 국제테러를 자행했다.
주로 항공기를 납치하거나 대사관을 점거해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목표를 공격하는 이들의 행동 방식은 국제테러의 원형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냉전 종결과 걸프전쟁, 중동평화 회담 등 국제적 상황 변화는 중동에서의 이들의 지위를 흔들었다. 무엇보다 걸프전쟁에서 다국적군에 참가한 시리아가 미국의 묵시적 동의 하에 레바논을 실효 지배하면서 이들의 행동 반경은 크게 좁혀졌다.
1997년 레바논은 국제적 압력과 타협, 베이루트에 잠복한 5명을 체포하면서 본격적인 '니혼 세키군 버리기'에 나섰다. 이중 4명은 올 3월 일본으로 송환돼 재판을 받고있다.
국제 수배에 쫓기면서 중남미나 동남아로 흩어져 새로운 거점을 찾던 대원도 잇달아 검거되고 있다. 시게노부가 붙잡힘으로써 레바논 여성과 결혼한 오카모토 고조(岡本公三)를 뺀 니혼 세키군은 6명만이 남았고 완전 소멸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시게노부는 1998년 이래 중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인민혁명당의 창설을 모색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의 현실상 허황되기 짝이 없는 구상으로 개인적 위안의 수단이라는 인상이 짙다.
북한으로 간 요도호 납치범의 운명도 거의 비슷하다. 9명중 3명이 북한에서 이미 눈을 감았고 1명은 일본에 잠입했다가 1988년에 붙잡혀 이미 형기를 마쳤다. 동남아를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다나카 요시미(田中義三)가 6월 말 태국에서 송환됨으로써 북한에는 4명만이 남아 있다.
일본 정부가 대북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테러 지원국 해제를 위한 북미협의에서도 이들의 추방이 핵심 조건이 돼 있어 오래지 않아 국외 추방돼 일본으로 송환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 속으로 묻혀가는 적군파의 뒷 모습과 함께 한때 일본을 흔들었던 모든 변혁의 목소리가 아득해지고 있다. 대신 사회적 무관심과 다수의 침묵이 두드러지고 있으며 그것이 집단주의로 온상이란 점에서 우익 강경파의 움직임을 주시하게 된다.

http://www.cc.matsuyama-u.ac.jp/~tamura/60nenndai.htm#annpo
http://www.asahi-net.or.jp/~gr4t-yhr/zenne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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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01 20:38 2002/03/0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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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린왕자 2007/08/18 2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십니까?
    위 일본 학생운동 자료 참고자료로 담아갑니다.
    좋은 번역자료 감사드립니다.
    시간 되시면 저의 블로그 방문해주십시요!!
    우연한 만남이 교류와 소통의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린왕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