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노동자 폭행사건 목격

일기 2003/02/01 23:26 PlusAlpha
오늘 저녁 수원발 청량리행 전철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설 연휴라 그런지 오늘따라 전철 안에는 동남아 출신 외국인노동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타 있었다.
내가 앉은 자리 근처에도 외국인 세 명이 앉아있었고, 그 부근 문 앞에도 두 사람이 서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다섯명은 일행이었다.
안양을 지났을 무렵 평화로운 전철안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등장했다.
앉아있던 세 명에게 다가가더니 다짜고짜 물었다. "야, 늬들 어디서 왔어? 응? 방글라데시 놈들이냐?"
외국인들은 한국말을 잘 모르는 듯 자기들끼리 '지금 뭐라는거지? 우리한테 말도 시키고 재밌는 사람이네' 하는 표정으로 서로 바라보다가 방글라데시 부분에서 말뜻을 알아차리고 "파키스탄"이라고 대답한 후 다시 자기들끼리 웃으며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어쭈, 비웃어? XX 내가 우스워보여? XX 니들 똑바로 해. 니들 몇살이야? XX" 하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여기서 XX는 욕설)
문앞에 서있던 두 명중 한 명이 나서서 그들 대신 한국말로 말했다. "우리는 파키스탄에서 왔어요. (앉아있는 친구들을 가리키며) 한국말 몰라요."
"니들 한국에서 살기 어렵지? 나도 어렵게 사는 사람이야... (횡설수설...) 한국에서 살려면 똑바로 해. XX"
"이것들이 어디서 까불어. XX 너 몇살이야? 응? 몇살이냐고? 나 사십이야. 이 XXX들..."
그랬더니 한 외국인이 숫자를 배워서 자신있다는 듯 "오십!!" 하더니 킥킥 웃었다.
"(당장이라도 때릴듯이 팔을 휘두르며) 뭐야? 이 XX가 사람을 놀려? 네가 오십이야? 똑바로 말해. 몇살 X먹었어?"
그중 가장 한국말을 잘 하는 외국인이 많이 해본 솜씨로 미소띤 얼굴로 고분고분하게 "아저씨, 술 많이 먹었어요. 여기 앉으세요." 하며 달래는 동시에 자기 친구들에게 뭐라고 설명을 하며 분위기를 진정시키려 애쓴다.
그래도 조금도 진정되지 않고 욕설은 더욱 심해지고 전철안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어 있지만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 없이 구경만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아주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빙글빙글 웃기까지 하며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실랑이 하기릍 20분. 그중 한 명이 더는 못참겠다는 듯 영어로 따졌다. 결과는 보나마나...
"이게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XXX들...(어쩌구저쩌구)XX"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도 이제는 정색을 하고 말한다.
"욕하지 말아요. XX은 나쁜 말이에요. 나쁜말 하지 말아요!!!"
"뭐야? 이 XX들이 단체로 한번 덤벼볼래?"
그제서야 한국인 아저씨 두 명이 와서 뜯어말렸다.
"아저씨, 이제 그만 하시죠. 이사람들도 욕하면 무슨말인지 다 알아들어요."
어휴... 나는 고개도 들 수 없이 그들에게 부끄러웠다. 말로만 듣던 외국인노동자의 인권유린 현장을 직접 목격해보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고 내가 마구 분통이 터져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만약 그 외국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이런 일을 당한다면 너무너무 속상하고 분해서 못견뎠을 것 같다.
당장이라도 "아저씨, 그만하세요. 이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시는 겁니까?"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니, 그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괴롭혀서 미안하다고 대신 사과라도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서 구경만 하고 말았다.

결국 그들은 구로역에서 내림으로써 그 상황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 남자는 따라내리더니 본격적으로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가장 반항적이던 한 명에게 심한 욕설을 하며 가슴을 전동차 쪽으로 세게 밀어붙이는 것을 보며 구로역을 떠나왔다. T_T 그들은 그 이후 어떻게 되었을지 매우 걱정되고 궁금하다.

아무 잘못도 없이,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외국인노동자라는 이유로 반말에 욕설에 폭력까지 당해야 하는 그들의 현실을 오늘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일부 악덕 기업주들이나 하는 짓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것이 21세기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오늘 전철안에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던 우리는 모두 그들에게 폭력을 가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런 것이 그들에게는 일상일지도 모른다.
그 고단한 일상을 어떻게 위로하고 어떻게 현실을 바꿔줄 수 있을지...
그 사람들에게 이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
답답하고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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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2/01 23:26 2003/02/01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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