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2003-04-24 11:06]
“내 인생은 의미가 전혀 없었어.” 올해 초 개봉한 영화 ‘어바웃 슈미트’의 주인공인 60대 퇴직자 잭 니콜슨이 쓸쓸한 노후를 기댄 곳은 하나밖에 없는 딸도, 믿었던 친구도 아닌 후원 결연을 한 탄자니아의 얼굴도 모르는 소년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뿐 아니라 누구든지 힘들 땐 어떤 것이라도 기댈 게 필요하다. 그 대상이 가족이든 친구든 상관없다. 그리고 때론 풍요스러운 여가가 ‘전쟁터’ 같은 일상에 대한 훌륭한 보상이 되기도 한다.
박영호(52) 우리은행 경영지원본부 부행장에겐 ‘바이올린’이 그런 존재였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학자금을 마련하지 못 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을 때에도, 지난 98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로 직접 1만명의 직원을 정리해고하는 고통스러운 순간 에도 늘 악기만 꺼내들면 마음 속에 ‘고요’가 찾아들었다.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악기는 원래 ‘클래식 기타’. 충남 강경 의 가난한 농가에서 3남 6녀의 7번째로 태어난 그는 학자금이 없어 중학교를 가지 못했다. 좌절감에 집에서 빈둥대던 그의 눈에 띈 게 줄도 한두 개 끊긴 구닥다리 기타였다. 그때부터 독학으로 배우기 시작한 기타가 검정고시로 입학한 강경상고를 졸업할 때 까지 유일한 여가거리가 됐다. 그런 그가 바이올린으로 종목(?)을 바꾸게 된 것은 지난 69년 12월 우리은행의 전신인 상업은행에 입행하면서부터. 당시 은행원들에겐 독서와 클래식 감상, 등산 등 이른바 ‘3락(三樂)’ 이 최고인기였다. ‘클래식 기타’ 탓인지 그도 클래식 감상에 푹 빠져들었고, 자연스럽게 바이올린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기타가 악기의 한계로 인해 정교한 음을 내지 못하던 것 에 싫증도 나던 차였다. “기타를 계속 치다보니 자꾸 음이 안 맞는 게 제 귀에도 들리더라고요. 음악사에 물어보니 기타가 평균율 악기라서 정교한 음을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죠. 그래서 순정률 악기인 바이올린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월 5만원의 레슨비를 내고 4년 동안 음대 여대생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월급이 30만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지출이었다. 얼마나 푹 빠졌던지 지난 79년 번스타인이 이끄는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첫 내한공연도 거금 12만원을 들여 여대생 강사와 함께 두 번이나 감상해야 욕심이 풀릴 정도였다.
어느 달엔 강습비와 악보, 오페라 공연 등을 쫓아다니다가 월급이 바닥나 은행 대출을 받기까지 했다. “왜 그렇게 바이올린에 미쳤는지…‘그냥’ 좋았습니다. 명동의 전문서점에서 일본 직수 입 악보를 보기 위해 일본어까지 공부할 정도였으니까. 나중에 이게 일본 지점으로 가는 좋은 계기가 됐죠.”
결혼도 당연히 늦을 수밖에. 당시로선 늦은 32세에서야 같은 은행에 다니던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뉴욕 필하모니 공연을 같이 갔던 여대생 강사는 그가 어렵게 꺼낸 프로포즈를 단칼에 거절했다. “촌뜨기 상고 출신에 대학도 뒤늦게 방송통신대로 갔으니 그 여학생 눈에 차지 않았겠죠. 오히려 그 때문에 바이올린을 더 열심히 켜게 됐고, 지금 쉬운 바이올린 협주곡 정도는 켤 수 있는 아마추어 ‘중급’까지는 된 것 같다”며 웃는다. 사실 현재 11개 시중은행에서 상고출신 임원급은 그를 포함해 겨우 3명. 그만큼 임원급에 오르기가 더 힘들었을 터이고, 이 때문 에 더욱더 절실하게 바이올린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특히 지난 97년 IMF 위기 이후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병하면서 직원 2만 명을 절반으로 잘라내는 ‘악역’을 담당해야 했던 때에도 바이 올린이 큰 힘이 됐다. 사기 진작 차원에서 전 은행원이 참가한 2001년 백두대간 종주와 지난해 실크로드 횡단도 모두 바이올린을 켜면서 마음을 가다듬었기에 가능한 아이디어였다. “그땐 합병으로 은행원 절반을 잘라내야 하는데, 밤에 잠이 올 리가 있습니까? 기댈 수 있는 거라곤 ‘바이올린’을 꺼내드는 것밖에 없었어요.”
그는 지금도 한 달에 서너 번씩 바이올린을 꺼내든다. 가끔 주말엔 ‘합주하자’며 졸라대는 고3 딸아이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인의 플루트와 함께 연주하는 ‘가족음악회’를 열기도 한다.
올해 초에는 다시 본격적으로 연주해보자는 결심도 했다. 올 초 임원급 신년회에서 우리금융 윤병철 회장이 ‘이번엔 이렇게 조촐하지만, 연말에는 악단도 부르고 성대하게 열자’는 제안 때문 이다. 속으로 ‘좋다. 1년 동안 갈고 닦아서 내 실력을 보여주자 ’는 각오를 하게 됐다.
사실 임원이 되면서 이런저런 저녁 약속 때문에 ‘매일 한 시간씩 연습해야 한다’는 평소 지론을 지키지 못했다. 그 많던 저녁 약속도 슬슬 줄이고 있다. 아마 올 연말 송년회에선 한층 더 성숙한 그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신보영기자 boyoung22@munhwa.co.kr
“내 인생은 의미가 전혀 없었어.” 올해 초 개봉한 영화 ‘어바웃 슈미트’의 주인공인 60대 퇴직자 잭 니콜슨이 쓸쓸한 노후를 기댄 곳은 하나밖에 없는 딸도, 믿었던 친구도 아닌 후원 결연을 한 탄자니아의 얼굴도 모르는 소년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뿐 아니라 누구든지 힘들 땐 어떤 것이라도 기댈 게 필요하다. 그 대상이 가족이든 친구든 상관없다. 그리고 때론 풍요스러운 여가가 ‘전쟁터’ 같은 일상에 대한 훌륭한 보상이 되기도 한다.
박영호(52) 우리은행 경영지원본부 부행장에겐 ‘바이올린’이 그런 존재였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학자금을 마련하지 못 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을 때에도, 지난 98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로 직접 1만명의 직원을 정리해고하는 고통스러운 순간 에도 늘 악기만 꺼내들면 마음 속에 ‘고요’가 찾아들었다.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악기는 원래 ‘클래식 기타’. 충남 강경 의 가난한 농가에서 3남 6녀의 7번째로 태어난 그는 학자금이 없어 중학교를 가지 못했다. 좌절감에 집에서 빈둥대던 그의 눈에 띈 게 줄도 한두 개 끊긴 구닥다리 기타였다. 그때부터 독학으로 배우기 시작한 기타가 검정고시로 입학한 강경상고를 졸업할 때 까지 유일한 여가거리가 됐다. 그런 그가 바이올린으로 종목(?)을 바꾸게 된 것은 지난 69년 12월 우리은행의 전신인 상업은행에 입행하면서부터. 당시 은행원들에겐 독서와 클래식 감상, 등산 등 이른바 ‘3락(三樂)’ 이 최고인기였다. ‘클래식 기타’ 탓인지 그도 클래식 감상에 푹 빠져들었고, 자연스럽게 바이올린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기타가 악기의 한계로 인해 정교한 음을 내지 못하던 것 에 싫증도 나던 차였다. “기타를 계속 치다보니 자꾸 음이 안 맞는 게 제 귀에도 들리더라고요. 음악사에 물어보니 기타가 평균율 악기라서 정교한 음을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죠. 그래서 순정률 악기인 바이올린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월 5만원의 레슨비를 내고 4년 동안 음대 여대생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월급이 30만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지출이었다. 얼마나 푹 빠졌던지 지난 79년 번스타인이 이끄는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첫 내한공연도 거금 12만원을 들여 여대생 강사와 함께 두 번이나 감상해야 욕심이 풀릴 정도였다.
어느 달엔 강습비와 악보, 오페라 공연 등을 쫓아다니다가 월급이 바닥나 은행 대출을 받기까지 했다. “왜 그렇게 바이올린에 미쳤는지…‘그냥’ 좋았습니다. 명동의 전문서점에서 일본 직수 입 악보를 보기 위해 일본어까지 공부할 정도였으니까. 나중에 이게 일본 지점으로 가는 좋은 계기가 됐죠.”
결혼도 당연히 늦을 수밖에. 당시로선 늦은 32세에서야 같은 은행에 다니던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뉴욕 필하모니 공연을 같이 갔던 여대생 강사는 그가 어렵게 꺼낸 프로포즈를 단칼에 거절했다. “촌뜨기 상고 출신에 대학도 뒤늦게 방송통신대로 갔으니 그 여학생 눈에 차지 않았겠죠. 오히려 그 때문에 바이올린을 더 열심히 켜게 됐고, 지금 쉬운 바이올린 협주곡 정도는 켤 수 있는 아마추어 ‘중급’까지는 된 것 같다”며 웃는다. 사실 현재 11개 시중은행에서 상고출신 임원급은 그를 포함해 겨우 3명. 그만큼 임원급에 오르기가 더 힘들었을 터이고, 이 때문 에 더욱더 절실하게 바이올린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특히 지난 97년 IMF 위기 이후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병하면서 직원 2만 명을 절반으로 잘라내는 ‘악역’을 담당해야 했던 때에도 바이 올린이 큰 힘이 됐다. 사기 진작 차원에서 전 은행원이 참가한 2001년 백두대간 종주와 지난해 실크로드 횡단도 모두 바이올린을 켜면서 마음을 가다듬었기에 가능한 아이디어였다. “그땐 합병으로 은행원 절반을 잘라내야 하는데, 밤에 잠이 올 리가 있습니까? 기댈 수 있는 거라곤 ‘바이올린’을 꺼내드는 것밖에 없었어요.”
그는 지금도 한 달에 서너 번씩 바이올린을 꺼내든다. 가끔 주말엔 ‘합주하자’며 졸라대는 고3 딸아이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인의 플루트와 함께 연주하는 ‘가족음악회’를 열기도 한다.
올해 초에는 다시 본격적으로 연주해보자는 결심도 했다. 올 초 임원급 신년회에서 우리금융 윤병철 회장이 ‘이번엔 이렇게 조촐하지만, 연말에는 악단도 부르고 성대하게 열자’는 제안 때문 이다. 속으로 ‘좋다. 1년 동안 갈고 닦아서 내 실력을 보여주자 ’는 각오를 하게 됐다.
사실 임원이 되면서 이런저런 저녁 약속 때문에 ‘매일 한 시간씩 연습해야 한다’는 평소 지론을 지키지 못했다. 그 많던 저녁 약속도 슬슬 줄이고 있다. 아마 올 연말 송년회에선 한층 더 성숙한 그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신보영기자 boyoung22@munhw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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