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준비

글모음/생각 2001/04/15 20:02 PlusAlpha
중앙일보 2001. 4. 14.

[삶과 문화] 스무살의 유서


학기 초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에세이 한 편을 써내도록 했는데 이번엔 좀 다르게 숙제를 냈다. 내일 내가 죽는다고 가정하고 유서 한 편을 써내라고 한 것이다. 학생들이 웅성거렸지만 취지를 설명했더니 곧 잠잠해졌다.

삶의 가치 점검해볼 기회

"이 과목이 '매스컴과 사회' 다. 이 사회에 내가 남길 수 있는 가장 절박한 커뮤니케이션은 무얼까. 유서는 잘 살기보다 잘 죽기가 어렵다는 걸 깨우치는 글이다. 유서를 써봄으로써 자신이 살아온 세상의 겉과 속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자. 아울러 내가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는 무엇인가를 점검해보자. 10년 후 혹은 20년 후 다시 이 글을 읽었을 때 후회하지 않고 빙그레 웃을 수 있도록. "

유서에 관해 가슴 아픈 기억 하나가 있다. 중학교에 다닐 때 함께 문예반을 했던 형에 관한 이야기다. 비록 나이는 한 살밖에 차이나지 않았지만 그는 매우 의젓했고 나보다 책도 많이 읽었다. 교지에 형이 수필 한 편을 썼는데 어린 내가 읽어도 가슴이 찡한 내용이었다.

까닭없이 몸이 피곤하고 머리에 열도 심하게 나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 갔는데 그 날로 입원을 하게 됐다. 겁이 났지만 주사 맞고 좀 쉬면 나을 거라고 해 안심했는데 어머니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형은 병원에서 좋아하는 책들을 실컷 읽게 됐다. 어느 날 책을 읽다 잠이 들었는데 흐릿하게 간호사끼리 소곤거리는 말을 흘려듣게 됐다.

그 내용이 청천벽력이었다. 어린 나이에 백혈병이라니 너무 가엾다는 것이었다. 감수성 예민한 소년은 숨도 크게 못쉬며 눈물로 베개를 적셨다. 그 날부터 이 소년은 죽음을 준비했다. 어머니에게도 슬픈 티를 내지 않았다. 다 알면서도 나를 위해 알리지 않은 어머니는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불쌍했다. 소년은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살면서 고마웠던 사람들, 친절했던 친구들, 귀여웠던 강아지 등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난리가 났다. 소년의 유서가 발견된 것이다. 어머니는 울고불고, 그 옆에서 의사와 간호사는 연신 땀을 닦고 있었다.

간호사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얘기가 아니라 옆방의 다른 환자 얘기였다고. 정말, 정말이냐고 다그쳐 물었다.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 소년은 그동안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고 어머니는 더 큰 소리로 곁에서 울었다. 유서는 찢지 말고 잘 보관했다가 결혼할 때 아내에게 읽어줘야겠다며 그 수필은 끝났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봄 방학이 내일쯤인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창문을 내다보시다가 "얘들아 저기 좀 봐라" 하셨다. 하얀 영구차가 학교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아, 나는 숨이 막힐 뻔했다. 영정 속의 얼굴은 바로 그 형이었던 것이다.

왜 어머니는 자식으로 하여금 죽음을 준비하도록 미리 말씀하지 않았을까. 그 심정도 이해가 간다. 그 후로 나도 유서를 쓰고 싶은 충동을 이따금 느꼈다. 수평선 너머로 배를 타고 사라지는 꿈을 꾼 다음 날은 실제로 유서 비슷한 글을 일기장에 남기기도 했다.

젊은 세대 나무랄순 없어

이따금씩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나와 손잡을 수 없는 저 많은 사람들이 실상은 이미 죽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학생들이 쓴 유서를 한 장 한 장 읽으며 누가 신세대를 가볍다고 나무랐는가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들 역시 죽음 앞에서는 경건하고 예의가 있었다. 무엇보다 매우 착했다. 다만 형식과 포장은 각양각색이었다.

시로, 그림으로, 사진으로, 심지어 노래로 남긴 학생도 있어 신세대의 다양한 취향을 읽을 수 있었다. 누군가 옆에서 괜히 애들 자살하도록 부추기는 거 아니냐며 시비를 걸었다. 그에게 유서 하나를 보여주었다.

"밤새 유서를 쓰면서 느낀 것은 자살의 유혹이 아니라 오히려 삶에 대한 열정이었습니다. "

주철환 /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왜 그 어머니는 자식으로 하여금 죽음을 준비하도록 미리 말씀하지 않았을까....

왜 나는 지금, 엄마로 하여금 죽음을 준비하도록 미리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가...

아... 정말 차마 내 입으로는 도저히 얘기할 수가 없다.
엄마 앞에서는 눈물도 보여서는 안될 것 같다.
(숨어서 소리내지 않고 우는 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원래 눈치빠른 우리엄마니까 이미 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얼마 남지 않은 시간동안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일을 해야
엄마와 내가 조금이라도 덜 아쉽게 헤어질 수 있을까...

"냉장고에 있는 새우젓은 육젓이라 맛있는 거니까 그냥 먹어도 되지만
밖에 있는 새우젓은 오젓이라 너무 짜니까 김치할 때나 넣어야 한단다."

"너희 둘 백일반지 돌반지 모아서 녹여 만든 금팔찌하고
금붙이들은 어디어디에 두었으니
지연이가 결혼한다거나 무슨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찾아서 함께 잘 상의해서 쓰도록 하려무나."


엄마는 이미 준비를 하고 계신가보다...
나는... 엄마를 보낼 준비가 아직 안되었는데...

요즘 아버지는 호스피스 병동 입원절차를 알아보고 계시는 중이다.

요즘따라 왜 그렇게 '죽음'이나 '유언'에 관한 글이나 TV프로그램은 자주 눈에 띄는지...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01/04/15 20:02 2001/04/15 20:0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