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2

글모음/생각 1998/06/14 01:03 PlusAlpha
비오는 토요일이 울적했다.
장마철이 되어 햇빛을 못보면 우울증에 걸린다는 사람도 있다던데...
어제의 나의 우울도 날씨탓인가...?
사람들은 월드컵 축구경기 때문에 들떠있던데 난 왜그런지 거기에도 전혀 관심이 쏠리지 않는다. 어차피 꼭 축구경기 지켜보고있지 않아도 골이 들어가면 온동네 사람들이 동시에 질러대는 환호성 때문에 그 사실을 즉시 알 수 있다.
나의 관심은 오히려 일년전 이맘때로 돌아가 있다.

작년 이맘때 무슨 생각들을 하며 어떻게 지냈는지 떠올려보았다.
3월의 비디오테잎(지금은 잊혀졌지만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경실련의 '김현철의 비디오테잎 사건'을 말함.) 사건 이후 힘겨운 몇 달을 보낸 뒤 간신히 마음을 추스려 잠시 안빈낙도의 행복을 느끼던 무렵이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깐. 청천벽력같은 엄마의 암 선고를 받았다. 정확히 1년전 오늘의 일이다.

작년의 바로 오늘인 6월 14일은 경주의 남산을 올랐던 날이다. 경실련 사무국 MT로 갔던 경주 여행이었다. 날씨는 아주 맑고 화창했으나 기온이 30도를 넘는 무더위였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별다른 마음의 준비도 없이 동네 앞산 오르듯 가벼운 마음으로 아침 아홉시에 시작된 산행이 지칠대로 지쳐 내려오기까지 여섯 시간 가까이 걸렸다.
산에서 내려와 뒤늦은 점심을 먹었던 식당의, 금정이라는 영악해 보이는 일곱 살짜리 막내딸과, 낯가리지 않고 아무나 잘 따르는 그집 개 누렁이와, 귀경길 버스안에서 몇몇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던 것과 ,그중에서도 특히 정선애 부장이 불렀던 유머러스하고 장황한(!) 노래의 멜로디와 어렴풋한 가사 내용이 기억난다. 후후.

아니... 그날의 일들은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일어났던 하나하나의 사건이 전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 막혀 서울 도착 예정시각이 자정을 넘게 되자, 난 중간에 휴게소에서 내렸을 때 집으로 SOS를 쳤다. 전철이 끊긴 뒤에 서울에 도착하면 안산까지 갈 일이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고속도로상에서 휴게소도 아닌곳에 차가 정차할 수 있는 (내가 아는 한도에서)유일한 곳인 신갈인터체인지 부근 정류장에서 내려 마중나와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와 함께 안산으로 돌아왔다. 그 차안에서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며칠전에 한 엄마의 내시경검사 결과가 나왔다는 얘기를. 그런데 상태가 나쁘다고 한다고. 암인 것으로 의심되니 당장 수술을 하자고 했다고...
난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그냥 남의 얘기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날의 산행 때문에 지쳐서인지 온 몸의 기운이 다 빠질 뿐이었다. 평소에 큰 병치레를 한 적도 없고 별로 약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던 엄마가 갑자기 이렇게 큰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거짓말 같았고, (발견해 준 의사선생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안산의 작은 병원에서 한 검사니까 믿을 수 없어, 돌팔이의사라 잘못 진단했을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가족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동생이 나서서, 다른곳보다는 신뢰할만하고 마침 동생의 아는 사람이 근무하고 있는 서울대병원으로 가자고 절차를 밟기 시작했을 때 아무도 이에 대해 이견이 없었다.
내가 엄마의 병을 실감하고 인정하게 된 것은 이틀 뒤 서울대병원에 갈 때 가져가라고 의사가 챙겨준 소견서와 내시경 촬영사진을 보고난 뒤였다. 궁금한 마음으로 열어본 소견서에는 지렁이 기어가는듯한 지저분한 의사들만의 '암호'가 아닌, 또박또박한 글씨체의 한글과 영어로 적혀 있었다. 병명에는 '...로 사료됨'이나 '...로 추정됨' 따위의 말이 붙지 않은 채 Stomach Cancer라고 단호하게 판정을 내리고 있었고, 증상란에도 역시 일반 영한사전으로도 찾아볼 수 있을만한 의학용어로 설명을 하고 있었다.
또한, 함께 들어있던 두 장의 사진은 3.5인치 디스켓 크기 정도의 컬러사진으로 내시경으로 찍은 엄마 뱃속의 모습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문제의 심각성이 느껴질만큼 붉은색 점막 위에는 노랗고 파란색의 궤양이 자리잡고 있었다.

후... 1년이란 세월 참으로 빨리 지나가는구나.
그 기억에 대해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
그때 일어났던 일이나 감상을 적어놓은 수첩을 펼쳐보면 그 당시의 기분이 되살아나 우울해지고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는 끔찍한 경험.
앞으로 나의 인생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는군...
(1998.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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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06/14 01:03 1998/06/14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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