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약간 이른 퇴근을 하게 되어 집 근처 대형할인매장에 가서 쇼핑을 했다. 최근 업무 스트레스가 꽤 심했던 것도 있고 해서, 지친 나에게 보상을 해줘야 해... 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쇼핑을 했다.
여기 저기 다니며 구경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가는 곳마다 매장 직원이 학교 선생님이시냐고 묻는다. 얼마얼마 짜리를 몇 퍼센트 할인해 준다길래 "그럼 얼마얼마겠군요"라고 얘기했더니 암산이 빠르다고 호들갑을 떨며 수학선생님이냐고까지 묻는다. -.-a

사실 오래전부터 교사 스타일이라는 말을 많이 듣기는 했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내가 하는 일보다는 교사가 내게 더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선생님에게 사랑(?)받는 모범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위 선생님들에게서 실망스런 모습을 많이 목격하고 교직쪽으로는 아예 눈도 돌리지 않았는데... 교사가 이렇게 좋은 직업인줄을 그땐 왜 몰랐을까...
그때 조금만 더 훌륭하고 멋진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정말로 지금 교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서너 군데에서 선생님으로 오해를 받으며 의류매장을 빠져나와 식품매장에 가서 장을 보고 있는데... 음료수 진열대 앞에서 순진하고 수더분하게 생긴 어떤 모르는 아주머니가 나에게 오더니 말을 건다.

"저기... 선생님한테 선물로 보내려고 하는데 뭐가 좋겠어요...?"

"...??"

"우리 애가 내일 소풍이라서 선생님께 음료수 한 병 갖다드리려고 하는데, 종류가 하도 많아서 도대체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요... 요즘 선생님들은 어떤걸 좋아하실까요...?"

이러면서 매우 의존적인 눈빛으로 나더러 골라달라는 거다.
그 선생님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건지...

당황스러웠지만 그냥 내 맘에 드는걸로(트렌디한 디자인의 PET병에 든, 달지 않은 차 종류) 몇 가지 찍어주고, "이 중에서 하나로 하시면 무난하지 않을까요... 저라면 이런 거 받으면 좋아할 것 같아요." 라고 하고 내 볼일을 보고 있는데...
잠시 후에 내가 골라준 차를 한 병 들고 다시 찾아와서 "저 이걸로 사기로 했어요. 골라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까지 하고 간다.
잠시 감동이랄까... 뭔가 훈훈한 기분과 함께, 한편으로 안쓰러운 느낌이 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아주머니... 옷차림이나 말투로 보아 촌지 들고 가서 선생님에게 잘보이려고 애쓰는 치맛바람 엄마와는 거리가 멀던데...
그 선생님은 이 1000원짜리 음료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이 음료수에 저렇게 애틋한 진심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 지, 이렇게 고민고민하며 조심스럽게 준비한 엄마의 마음을 알아주기나 하려는지... 혹시 그 선생님은 이런 음료수 싫어하는 건 아닌지... 짧은 순간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부디 그 마음이 선생님에게 잘 전해졌기를... 그 녹차가 선생님 마음에 들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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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7 12:32 2007/04/27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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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my 또는 신비 2007/04/30 1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흐음... 뭔가 찡해요.

  2. 강아지맘 2007/05/01 1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생님 스타일의 알파님이 골라 주신거니 맘에 드셨을거에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