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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小森陽一, 高橋哲哉 외
원제: ナショナル·ヒストリ-を越えて(1998)

얼마전 읽다가 던져버린 책 얘기를 할까 한다.
'도서출판 삼인'이 간행한 "국가주의를 넘어서"라는 책이다.
책꽂이에 꽂히지 못하고 바닥에 던져져 있는데 제목만 봐도 울화가 치밀 지경이다.

이 책은 도쿄대학출판회에서 발행한 "ナショナル·ヒストリ-を越えて 내셔널 히스토리를 넘어서"라는 책을 번역한 것인데, 일본의 유명한 진보적 지식인들이 쓴 일본 내셔널리즘의 비판서로, 도쿄대 대학원에 다니는 재일교포 친구가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 준 책이다.

추천까지 받은 이 책을 보고 내가 짜증을 내는 이유는 번역때문이다.
엉터리 번역에 짜증이 나서 차마 끝까지 읽지 못하고 3분의 1까지 읽다가 던져버리고 말았다.

처음 오역을 발견한 것은 39페이지 13행에서였다.
일본의 전 수상인 細川護熙(호소카와 모리히로)를 '호소카와 모리야스'라고 아주 엉뚱하게 표기해 놓은 것이다.
일본어를 아무리 잘 아는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일본인조차도 고유명사, 특히 인명을 읽기 어렵다는 것은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다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한자로만 된 이름을 어떻게 음독하는지는 본인에게 직접 확인하지 않은 이상은 정확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물론 護熙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사람중에는 진짜로 '모리야스'라고 발음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본 수상 정도면 우리나라에도 충분히 알려져 있는 유명인이다. 모르면 신문이나 인터넷으로 검색해봐도 될 일이고, 일본의 인명사전을 찾아볼 수도 있으며, 일본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정도 수준의 일본어 서적을 번역할 정도의 사람이(역자약력을 보니 일본의 명문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는데) 불과 몇 년 전의 일본 수상 이름을 틀리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을 접하고 나자 나는 이 책을 신뢰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처음부터 인명을 조사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구 쏟아져나왔다.

p.29, 15행 및 p.103, 11행 秋山眞之 : 아키야마 마네유키(×) → 아키야마 사네유키 (○)
p.57, 16행 小田切秀雄 : 오다키리 히데오(×) → 오다기리 히데오(○)
p.119, 17행 藤原鎌足 : 후지와라노 카타마리(×) → 후지와라노 가마타리(○)
p.124, 8행 吉野作造 : 요시노 사쿠죠(×) → 요시노 사쿠조(○)
p.124, 9행 美濃部達吉 : 미노베 타츠요시(×) → 미노베 타츠키치 (또는, 다쓰키치)

이 책에 수많은 인명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일본의 국어사전
廣辭苑(제4판, SONY 전자사전) 에서 찾아서 정확히 확인한 것만 열거한 것이고,
아마도 인명사전을
놓고 찾으면 훨씬 더 많이 나올 것 같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어의 문자인 히라가나(ひらがな)를 '히라카나'라 하는 등(p.52, 19행) 표기법이 엉망이고 고유명사의 표기도 일관되지 않고 제멋대로이다. p.120에서는 같은 페이지에서 똑같은 가마쿠라를 지칭하면서도 13행과 18행에 각각 '가마쿠라'와 '카마쿠라'라는 일관성없는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 조금만 신경쓰면 정확히 할 수 있는 부분조차 이렇게 소홀히 했다면 다른 번역내용을 어떻게 정확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이정도로 하자.
오류를 다 찾아내다가는 끝이 없다. 이것도 3분의 1까지만 봤을 때의 상황이다.

여기서 아주 마음을 곱게 써서 번역자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출판사의 편집 담당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잘못된 부분을 내가 책에다가 일일이 표시를 해봤더니 페이지는 마치 원고를 처음 깔고 나서 초벌 교정을 보고 난 것처럼 엉망이 되어버렸다.
단 한 번도 교정이나 감수를 제대로 보지 않고 인쇄를 한 것으로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출판사에 전화를 해서 담당자와 통화를 했다.
그랬더니 내가 지적하는 모든 것을 시인하고는, 한 술 더 떠서, 지적한 내용 다 알고 있다, 사실 다른 것도 더 있는데 그것밖에 못찾아냈느냐는 식으로 얘기하더군.
나는 너무 깐깐하고 치사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서 일일이 지적하지 않고 드문드문 아주 결정적인 부분만 지적을 한건데 말이다.

그리고 그 담당자는 출판일정이 급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사과를 했다.(시한이 있는 잡지도 아니고 단행본인데 뭐가 그리 급했을까...)
그러나 안타깝지만 이것은 사과 한마디로 끝날 일이 아니라고 본다. 리콜 감이다.
서점에 배포되어 있는 책을 모두 회수하고 오류를 수정한 개정판을 찍어서 이미 구입한 독자들에게는 새 책으로 바꿔주어야 제대로 수습이 되는게 아닐까...?

그렇게 얘기했더니 담당자는 앞으로 그렇게 하는게 마땅하기는 하지만 당장은 그럴 계획이 없다면서 나중에 개정판이 나올 때 연락하겠다고 내 연락처만 받아놓았다.
이것이 작년(1999년) 9월 중순의 일이다.
물론 그 후로 아무런 소식도 없었으며... 그 책은 여전히 서점에서 팔리고 있다.

음... 좀 흥분을 했다...
사실 그때 기분같아서는 이 책을 아주 꼼꼼하게 끝까지 다 분석을 한 뒤에 "안티 삼인"사이트라도 만들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사실 '도서출판 삼인'에서 나오는 책은 '계간 당대비평'을 비롯하여 내가 관심있는 분야의 논문이 자주 소개되고 있어서 관심 있게 즐겨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보고 정말로 대단히 실망했다.

여기서, 이 책이 더욱 위험한 것은 상당히 학문적이고 전문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이 어딘가에서 인용을 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인용했다가는 분명히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나 자신도 일본어 번역을 주된 업무의 하나로 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외국어를 번역한 책은 절대 100% 신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어딘가에 있을 오역의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이 책만 보면 아직도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200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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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에 대한 뒷얘기이다.

"국가주의를 넘어서"에 너무 실망한 나머지 한동안 거들떠도 안보고 이리저리 굴리며 먼지가 쌓이는 것을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래도 무슨 '증거물'로 보관해야 할 것 같아 버리지도 못하고...)

그러다가 며칠전 인터넷 서점에서 다른 책을 검색하던중 이 책의 개정판이 이미 나와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소리소문도 없이...제목도 원제 그대로 "내셔널 히스토리를 넘어서"라고 바꿔서...
글쎄 그 개정판이 나온지가 벌써 1년이나 되었더군.

그렇다면 내가 저 윗글을 쓰던 무렵에도 개정판이 나온지 이미 몇 달이 지나있는 시점이었다는 얘기인데...
개정판이 나오면 새 책을 보내주겠다고 다짐을 하며 연락처를 적어놓더니 어떻게 된건지...-_-
하긴... 이정도는 나도 이해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전화한 것이 오래전의 일이기 때문에 주소를 적은 메모지를 잃어버렸을 수도 있고 어쩌면 담당자가 새로 바뀌었을 수도 있고...

하지만 이걸 알게된 이상 말이라도 한 번 더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출판사에 다시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아주 순순하고 공손하게 주소를 다시 받아적고는 책을 새로 보내주었다.

방금 도착한 새 책을 품에 안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얼른 그 문제의 오류부분을 찾아봤더니 인명의 경우는 내가 지적했던 부분이 모두 바르게 고쳐져 있었지만 히라가나/히라카나, 가마쿠라/카마쿠라를 혼용한 부분은 여전히 남아있는등 100% 완벽하게 개정되지는 않았다.

그날의 속상함과 배신감으로 똘똘 뭉친 흥분을 이제는 이 책을 보며 조금 누그러뜨려야 하는건지...

이렇게 요구할 때만 바꿔줄 것이 아니라 광고나 보도를 통해 이 책의 독자들에게 알림으로써 (열린책들의 <도스또예프스키 전집> 처럼...) 좀 더 적극적인 리콜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2001.5.10.

참고 : 중앙일보 2001년 1월 27일자 기사

출판사 큰 흠집 남긴 『도스또예프스키 전집』 오자·오역공방

지난해 출간된 『도스또예프스키 전집』의 오자 ·오역 문제와 관련, 출판사 열린책들(대표 홍지웅) 과 네티즌들간의 신경전이 진정 조짐을 보이고 있다.
출판사측은 우선 오자 및 탈자들을 모아 홈페이지(
http://www.openbooks.co.kr) 게시판에 정오표를 만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또 오는 7월 이전에 다른 오역도 바로잡아 개정판을 내겠다고 약속했고 이중 가장 오류가 많은 제25권은 먼저 개정판을 만들어 구입자들에게 무료로 보내주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에 ‘안티 열린책들 운동’까지 불사하겠다던 네티즌도 다른 출판사의 홈페이지에 올렸던 비판 글들까지 삭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국내 출판물 사상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이 사실이고,바로 그런 높은 기대치 때문에 빚어진 실랑이는 결과적으로 국내 출판물의 제작과 관련해 중대한 기준치로 남을 전망이다.
즉 광고비까지 포함해 4억6천여만원을 투자한 『도스또예프스키 전집』은 앞으로 이와 유사한 기념비적 출판물들이 도달해야 할 완성도의 선을 보여준 셈이다.
차제에 언급해야 할 대목은 이번 사태의 핵심은 오자나 오역같은 책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독자들의 지적이 나온 초기 단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출판사의 태도이다.
출판사측이 전집 출간을 해낸 것은 지난해 6월이었다. 총 25권, 1만2천5백74쪽의 이 전집은 본격적인 번역자 선정 작업부터만 7년의 제작기간을 거친 역작이었다.그러나 출간된 다음 달부터 오자와 오역에 대한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출판사는 그것을 ‘있을 수 있는 실수’ 정도로 판단했다. 그리고 9월 말 출판사 사옥에 화재가 발생했다.출판사 이전과 홈페이지 서버 교환 과정에서 열린책들은 일단 전집의 오류에 대해 사과 내용을 담은 글을 올린 후 곧 홈페이지를 전면 폐쇄, 개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네티즌들은 이를 “잘못을 가리고 회피하려는 행위”라며 열린책들 자체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달 초 출판사가 서둘러 홈페이지를 재개했고 다시 한번 독자들에게 사과하며 정오표 코너까지 따로 개설한 것은 뒤늦은 대응의 결과이다.
사실 열린책들이 1차로 공개한 정오표를 보면 프랑스어와 독일어 오식을 제외한 순수한 오탈자는 현재의 출판계에선 충분히 용인될 만한 수준이다.
그런 출판계의 관행에 물들어 독자들의 높은 기대치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이 출판사의 잘못이었다.
“번역판을 처음부터 다시 꼼꼼히 읽으면서 초심(初心) 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홍사장의 말을 다른 출판인들도 한번 새겨들었으면 한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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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일을 직접 하시는 분이셔서 그런지 그렇게 오역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 참 부럼네요. 저야 원서를 보면 흰건 종이요 검은 건 잉크가 되어놔서요..^^;; 그런데, 삼인 같은 출판사도 힘들 거에요. 물론 도서출판 삼인이 백의출판사보다는 사정이 낫겠지만, 언젠가 한번 백의출판사를 찾아갔었던 친구말에 의하면, 경리를 맡아보시는 20대 여성분을 제외하고는 딱 2분이서 운영하고 있는 출판사라고 하더라구요.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좋겠지만,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아야만 한다면 좀더 철저하게 번역본을 만들어낼 여유라는 것 자체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출판사들(자신의 색깔이 없이 입도선매, 박리다매를 하는 도서출판'이후'를 제외하면)이 어렵다는 건 번역일을 하시는 PlusAlpha 님이 더욱 잘 아실거라고 생각되네요. 물론 오역이나 오자를 찾아내서 직접 전화까지 해 준 독자에게 '그것밖에 못 찾았냐'는 식의 반응을 보인 그쪽 출판사 분은 좀 실망스럽기는 하지만요. 주제 넘게 몇 자 적었습니다... --일리톨

오 여기 남기신 글을 이제야 뒤늦게 발견했네요. ^^ 물론 저도 번역도 하고 책 만드는 일도 해봤기 때문에 자일리톨님 말씀대로 출판사쪽의 어려운 사정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엉터리 책을 만들어 놓고 독자들에게 너그럽게 이해해 달라고 응석을 부릴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책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출판계에 뛰어들었다면 최소한의 사명감과 책임감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전화를 받은 그 삼인의 직원이었다면 오류를 지적하고자 전화한 독자를 설득해서 교정보는 자원봉사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했을 것입니다. :) --PlusAlp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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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18 14:55 2001/09/1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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